꽃비 속의 월송정(越松亭)
꽃비 속의 월송정(越松亭)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1.04.05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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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에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5년째 대(代)를 이은 일년생 백봉은 봄비 탓인지 일상보다 늦은 네 시 이십구 분경에야 산천이 밝아옴을 울음으로 알렸다. 이날 따라 평소의 스무 번에 다섯 번을 더한 것은 ‘주님 부활 대축일’을 알리고 싶어서였을까.

이윽고 들려온 세 번째 울음소리는 수양 홍도·백도 가지에 송이송이 걸린다. 딱새의 알람 소리를 뒤로하고 이른 아침 빗속에 길을 나선다. 삼호대숲을 마주하니 꿩과 멧새, 왜가리가 울음소리로 존재를 알린다. 봄비가 잦아들자 주위가 밝아온다. 사방을 둘러보는 시선의 끝자락엔 봄비에 진 꽃잎들은 여기저기 엎드린 채 숙연한 모습들이다. 밟히는 꽃잎들은 거룩한 생명으로 거듭나 경건한 마음의 성호를 긋게 만든다.

흩어진 꽃잎에서 보혈(寶血)의 흔적을 묵상하고, 무리로 비상하는 백로의 날갯짓에서 부활(復活)의 의미를 되새긴다. 백로의 눈부신 몸빛에서는 인간의 죄를 대속(代贖)하신 십자가 예수님의 하얀 보혈의 환상을 보는듯하다. 때맞춰 비켜 가지 못해 야속하던 봄비가 흩어진 벚꽃을 통해 묵상(默想)으로 인도한 마중물이 되었음에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다.

이른 오후, 봄비를 비집으며 경북 울진군 평해읍 월송정을 향해 떠났다. 목적은 달맞이였다. 이미 일주일 전 음력 2월 보름에 찾았어야 했지만, 사정으로 미룬 터였다. 경주 황룡사 터 부근 보문단지 나들목을 지날 때는 한동안 인내심이 필요했다. 이윽고 기다린 보람으로 길은 뚫렸고, 목적지까지의 도로는 한산했다. 후포항을 찾아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오랜 시간을 달려도 목적지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알고 보니 팔십 킬로미터나 지나쳤다. 내비게이션을 이용하지 않는 교만의 결과였다. 길을 되돌려 목적지 주차장에 차를 세웠을 땐 어둠이 이미 주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입구 일주문 현판의 ‘관동팔경월송정(關東八景越松亭)’이란 한자가 먼저 객을 맞는다. 월송정(越松亭)은 통천 총석정(叢石亭), 고성 삼일포(三日浦), 간성 청간정(淸澗亭), 양양 낙산사(洛山寺), 강릉 경포대(鏡浦臺), 삼척 죽서루(竹西樓), 울진 망양정(望洋亭)과 함께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힌다. 주차장에서 10분가량 걸으니 송림 속의 월송정이 보인다. 모래사장부터 찾았다. 달빛을 조명 삼아 파도 소리를 삼현육각의 연주곡 삼아 필자는 무대 위 사막(絲幕) 속 춤꾼이 되어 한없는 달빛 아래 넓은 모래밭을 걷고 또 걸었다. 열두 계단을 밟아 누상에 오르니 눈앞은 온통 모래사장과 밀려왔다 가기를 반복하는 푸른 파도뿐이다.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니 원한과 근심과 기쁨이 한순간에 사라지는듯하다. 이어진 해송 숲은 시야를 조금은 가려도 확 트인 풍경보다 절제미가 있어 오히려 좋다.

하현달은 구름 속에서 나타나고 숨기를 되풀이한다. 박쥐 두 마리가 에어쇼라도 하듯 비켜 날며 솔숲 속을 제집인 듯 헤집고 다닌다. 백로 세 마리는 날갯짓이 여유롭지 못하고, 흰뺨검둥오리 네 마리는 빠르게 바다를 향해 날아간다. 소나무에 걸린 하현달은 보름달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필자가 보름맞이를 염두에 두는 이유가 있다. 세속과는 달리 승가의 보름맞이는 삭발·목욕하는 일이 전통 의식의 하나인 탓이다. 비록 지금은 사회에 참여하는 일로 향 피워 예불하고 발우로 공양하며 산사(山寺)에서 여생을 보내진(焚香洗鉢過餘生) 못하지만, 수행자의 자세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보름의 의미를 챙기려는 것이다.

눈에 밟히는 월송정의 반려자 파도의 애원성을 뒤로하고 헤어진 하현달을 흥해(興海) 칠포(漆浦)에서 다시 만났다. 그런 하현달과 숨바꼭질을 반복하며 밤 10시가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종일 운전한 몸은 파김치처럼 축 처졌지만, 이날 하루는 유익한 현장 경험의 날이었다.

다음날, 구름을 박차고 허공을 치솟는 제비처럼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삼호대숲을 찾았다. 어제 칠포에서 헤어진 하현달이 어느새 스무나흘 관음보살처럼 울산을 찾아와 구름 무대에 달무리 너울을 쓴 모습을 태화강 거울에 드리운 채 떼까마귀, 백로, 왜가리, 꿩, 멧새, 직박구리, 찌르레기 등 뭇 생명의 잠자리를 낮은 채광으로 은은하게 감싸주고 있었다.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조류생태학박사·철새홍보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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