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해서 눈물 나는-애니메이션 ‘벼랑 위의 포뇨’
순수해서 눈물 나는-애니메이션 ‘벼랑 위의 포뇨’
  • 이상길
  • 승인 2021.03.25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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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벼랑 위의 포뇨’ 한 장면.
애니메이션 ‘벼랑 위의 포뇨’ 한 장면.

 

나 같은 TV세대들에게 나이를 먹는다는 건 만화영화와는 멀어지는 일이기도 했다. 지금의 N세대(디지털 세대)들은 이해를 못하겠지만 우리 때만 해도 TV에서 주로 방영됐던 만화영화는 동네친구와 동급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80년대 초중반, 월화수목금토일에 방영되는 만화영화가 다 달랐는데 <미래소년 코난>처럼 좋아하는 만화영화가 방영되는 요일은 그렇게 특별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솔직히 전날부터 들떴다. 또 공휴일이면 특별 편성된 단편만화영화를 꼭 찾아서 봤는데 그 때는 신문지면 중 TV편성표가 있는 면이 가장 빛이 났었다. 그랬다. 내 또래는 다들 비슷했겠지만 그 시절 내 삶은 만화영화, 즉 애니메이션 같았다.

그랬던 게 중학생이 되면서 실사로 바뀌더라. 실사는 애니메이션보다 잔인하다. 같은 장면이라도 실사로 표현하느냐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잔인한 장면이라도 애니메이션은 현실 아픔까진 잘 못 느끼는데 실사는 진짜로 아파서 어떨 땐 두 눈 뜨고 못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랬다. 중학생이 되어서 삶이 실사로 바뀌게 된 건 사춘기 탓도 있겠지만 잔인해진 현실 때문이 컸다. 매달 시험이 끝나고 나면 전체 등수가 교실 뒤편에 내걸렸는데 이름 앞에 붙은 숫자(등수)로 비교되는 현실은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등수가 낮을 땐 아팠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거 같다. 만화영화가 시시하게 느껴진 게. 가짜니까. 대신 실사물에 길들어져 갔다. 진짜가 시작된 셈인데 말하자면 삶이 서서히 고달파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애도 아니고 어른이 되서 극장에서 만화영화를 보기엔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아직도 하고 있다. 그래서 90년대 초중반 <토이스토리>로 시작된 픽사 애니메이션이든 <미녀와 야수>, <알라딘>, <포카혼타스> 등 당시 디즈니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극장가를 떠들썩하게 할 때도 극장에선 늘 실사영화만을 찾아다녔지 애니메이션은 거의 티켓팅을 하지 않았더랬다. 그나마 입대를 앞두고 심란한 마음에 될 대로 대라는 식으로 본 <라이온 킹>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그랬던 내가 다시 극장에서도 애니메이션을 적극적으로 보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2004년에 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었다. 한 마디로 그 깊이에 놀랐다. 외모지상주의 속에서 마음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그 작품은 비록 화면은 오색찬란한 물감들로 범벅이 된 가짜 세상이었지만 던지는 메시지만큼은 진짜였다. 원래 예술가는 거짓으로 진실을 말하는 법. 오히려 가짜 세상으로 진짜 세상의 진실을 건드리니 그 효과는 더 탁월했다. 해서 몰라봐서 미안했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과거 작품(지브리 스튜디오 작품)들은 물론 미국 픽사 애니메이션까지 시간 나는 대로 짬짬이 정주행을 했고, 이후 지브리 및 픽사 개봉작들은 돈 아까운 줄 모르고 극장에서 거의 다 챙겨봤었다. 그렇게 해서 개봉 당시 극장에서 못 봐 조금 아쉬웠던 <벼랑 위의 포뇨>도 최근에 보게 됐다.

결론부터 말하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작심하고 동심으로 돌아간 듯 했다. 2001년작 <이웃집 토토로>와는 또 달랐는데 <이웃집 토토로>가 토토로를 중심으로 부분적이라면 <벼랑 위의 포뇨>는 전체적이었다. 그러니까 영화 속 세상 전체가 동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호기심 많은 물고기 소녀 포뇨(나라 유리아)가 바다 속 생활에 싫증을 느껴 육지로 탈출을 감행해 다섯 살의 소스케(도이 히로키)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는데 포뇨와 소스케의 모습은 물론 세상 전체가 마치 한 편의 동화처럼 순수해서 보다가 눈물이 찔끔 났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봤더니 그건 중학생이 되면서 내가 잃어버렸던 세계에 대한 일종의 그리움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그 세계는 분명 포뇨와 소스케가 사는 세상과 닮았었다. 순수했다.

실사가 날 것 그대로라면 만화영화에는 보호막이 있다. 포뇨와 소스케가 사는 세상에선 거대한 해일마저 한 편의 동화가 됐듯이 만화영화에선 고통마저 예쁘다. 오색찬란한 보호막으로 인해. 그래서였을까? 영화가 끝난 뒤 괜히 문방구에 물감 사러 가고 싶어지더라. 2008년 12월 17일 개봉. 러닝타임 100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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