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에 대한 예의
흙에 대한 예의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1.03.22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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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평 남짓한 주말농장 텃밭을 분양받았다. 푸른 동해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이어서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며 농사를 지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마냥 설레었다. 흙을 부드럽게 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남편이 삽으로 땅을 파면 나는 호미와 괭이로 흙덩이를 잘게 부수었다.

잠시 후 흙 속에서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 세 마리를 만났다. 농기구에 다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다시 흙을 파서 묻어주며 혼잣말로 격려해 주었다. “좀 더 자다가 경칩이 되면 나와. 건강하게 잘 자라야 해.”

이번에는 남편에게 한 마디 건넸다. “자주감자를 심고 싶어요. 보랏빛 감자꽃이 필 때쯤 바다 한 번 보고 감자꽃 한 번 보며 하루 종일 놀다 보면 집에 안 가고 싶어질지도 몰라요.” 흥겹게 콧노래를 부르며 밭일을 계속했다. 그 사이 무언가 까만 것이 시야를 자극했다. 이게 뭐지? 놀랍게도 검은색 비닐조각이 아닌가.

처음엔 ‘조금만 골라내면 괜찮겠지.’ 하는 생각에 귀찮아도 부지런히 골라냈다. 하지만 기대는 빗나갔다. 흙을 파면 팔수록 비닐조각이 고구마 줄기처럼 딸려 나온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작년에 주말농장을 분양받은 분이 ‘비닐 멀칭’ 농사를 짓고는 폐비닐을 안 걷어내고 그대로 둔 게 분명했다. 허리를 굽혀, 그것도 세 시간이나 비닐조각을 걷어냈다. ‘이만하면 흙이 숨 쉬는 데는 지장이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밭일을 마쳤다.

귀갓길에 붉은 노을에 분홍빛으로 물든 바다에 홀려 잠시 발길을 멈추었다. 세상에, 이렇게 환상적인 텃밭이 또 있을까? 집에 도착하기 바쁘게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지인이 겉절이 하라고 주고 간 겨울초의 향과 비트의 색은 비길 데 없었고 맛 또한 일품이었다. 이날 따라 온몸이 뻐근하고 조금은 피곤했지만 마음만은 홀가분했다.

그 뒤 봄비가 제법 많이 왔다. 목련이 하나둘 꽃봉오리를 터트릴 즈음 다시 밭에 가보았다. 아, 이를 어쩐담! 지난번에 골라낸 것들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파묻혀 있던 비닐조각을 봄비가 도로 끄집어낸 것이 아닌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비닐조각과의 씨름에 두 번째로 매달렸다.

어떤 이는 비닐을 ‘유용한 농자재’라고 말한다. 흙 속의 병원균이 작물로 번지는 것을 막아 농약 사용을 줄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또 다른 이유도 든다. “한여름 땡볕에 잡초 제거를 안 해도 되고, 가물 때 물을 많이 안 주어도 된다. 그러니 텃밭 가꾸기를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닐 멀칭을 한 뒤 폐비닐을 안 걷어내면 심각한 토양오염을 일으킨다는 건 이제 상식이다. 폐비닐을 그대로 둔 채 밭을 갈아엎는다면 나중에는 어떻게 될까? 비닐이 잘게 찢어져서 흙 속에 섞이면, 공기와 물의 흐름을 막아 토양미생물의 생육을 방해해서 토양 생태계를 파괴하고 농작물도 잘 자라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애초에 튼튼한 비닐을 사서 쓰다가 재활용하는 것이 환경을 보호하는 일이 아닐까?

주말농장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덕분에 텃밭을 분양받아 잘 사용하고 있다는 인사와 함께 텃밭의 상황을 알려주며 폐비닐 제거 대책을 세워 달라고 부탁했다.

적은 비용으로 여가를 선용할 수 있는 주말농장. 그 텃밭을 가꿀 자격이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 땅’이란 주인의식을 가지고,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으면서, 제대로 보존할 수 있는 사람이 텃밭을 가꾸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흙은 조건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며 많은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푼다. 자연이 주는 최고의 선물, 흙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우리 모두 지켜야 하지 않을까?

천애란 사단법인 색동회 울산지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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