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감 따윈 집어치우고, 그냥 내편 들어줘-영화 ‘내가 죽던 날’
정의감 따윈 집어치우고, 그냥 내편 들어줘-영화 ‘내가 죽던 날’
  • 이상길
  • 승인 2021.03.18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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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가 죽던 날’ 한 장면.
영화 ‘내가 죽던 날’ 한 장면.

 

사실 선과 악, 즉 옳고 그름은 인간세상에서만 존재하는 구분이다. 대자연과 우주는 선과 악을 모른다. 굶주린 맹수가 연약한 사슴을 잔인하게 잡아먹는다고, 혹은 어느 날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해 인류를 멸종시킨다고 과연 악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신 이 우주엔 빛과 어둠이 존재한다. 대략 90% 정도가 어둠이고 빛은 10% 정도를 차지한다.

아무튼 ‘선과 악’은 ‘빛과 어둠’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허약하다. 법과 도덕으로 구현돼 인간세상의 질서를 견고히 지탱하고 있는 선과 악은 사실 외부의 작은 충격으로도 금세 흔들리거나 무너지고 만다. 쉽게 말해 평화로울 때야 옳고 그름이 명확히 존재하지만 난리통엔 그 구분이 모호해지거나 사라지게 된다. 당장 소행성이 지구로 돌진하고 있다는 사실이 진짜로 알려진다면 지금의 옳고 그름은 휴지조각이 되고 오로지 생존만이 남게 된다. 너무 나갔다고? 하지만 10명을 살해한 자는 인간백정이 돼 구속이 되지만 전쟁터에서 수만 명을 죽인 사람은 영웅으로 추앙받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인생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히스 레저)도 초반 마피아 은행을 털면서 이런 명대사를 날린다. 은행매니저(윌리엄 피츠너)는 감히 마피아 은행을 터는 조커를 향해 “범죄자들끼리도 지킬 게 있어. 명예, 존경심. 그게 뭔지나 알아?”라고 소리를 친다. 그러자 조커는 그의 입에 수류탄을 집어넣은 뒤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아는 건 말이야. 사람이란 죽을 만큼의 고통을 겪으면 다들 이상해진다는 거야.”

그렇다. 한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가장 큰 모순은 착하게 살아도 불행이 닥칠 수 있다는 것. 사는 게 고통스럽고 힘이 들 땐 옳고 그름 따윈 아무 것도 아니게 되기 십상이다. 그 때는 손을 잡아주거나 따뜻한 위로의 말과 함께 응원을 해주는, 그러니까 ‘내편’이 그냥 선(善)이다. 형편 좋을 때 정치판이나 조직사회에서 자주 벌어지는 ‘니편, 내편’의 그 내편이 아님을 미리 밝혀둔다.

관련해 인생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도 이런 명대사가 나온다. 건설회사 부장인 동훈(이선균)은 월 오륙백을 버는 사람이지만 삶이 지치고 힘들기만 하다. 직장에서 대학 후배이자 CEO였던 준영(김명민)에게 늘 무시와 천대를 당했는데 얼마 전에는 자신의 아내가 준영과 바람을 피우고 있는 것까지 알게 됐던 것. 그리고 그 모든 사실을 알고는 동훈을 응원해주는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그게 바로 계약직이었던 지안(이지은)이었다. 지안은 사채 빚에 쫓기고 있었고, 준영과의 거래를 통해 동훈을 도청하게 되면서 그 모든 걸 알게 됐다. 하지만 동훈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는 그에게 “화이팅”하라면서 되레 지켜주려 한다. 해서 동훈은 새벽녘에 형제들과 함께 귀가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죽고 싶은 와중에 ‘죽지 마라. 당신은 괜찮은 사람이다. 파이팅해라’ 그렇게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 숨이 쉬어져.” 그리고 동훈은 도청이 들킨 지안에게 이런 말도 한다. “고맙다. 거지같은 내 인생 다 듣고도 내 편 들어줘서.”

<내가 죽던 날>에서 고등학생인 세진(노정의)도 지금 동훈과 비슷한 상황이다. 잘 살았던 집이었는데 어느 날 마약밀수를 했던 아빠의 범죄행각이 드러나면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난다. 아빠는 도주하고 엄마는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오빠까지 마약복용으로 옥살이 중이었는데 아무 것도 몰랐던 세진은 주요 증인으로 경찰의 감시와 보호를 받으며 외딴 섬에서 한 동안 생활하게 된다. 어린 나이에 갑자기 닥친 불행을 감당할 수 없었던 세진은 매일 섬 절벽 위에 섰고, 그러다 결국 뛰어내리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그리고 막 복직을 한 현수(김혜수)는 세진의 죽음을 자살로 종결짓기 위해 섬으로 향하게 되고 그곳에서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된다.

사실 <내가 죽던 날>은 <나의 아저씨>와 아주 비슷하다. 각본까지 쓴 박지완 감독이 <나의 아저씨>에서 영감을 얻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 결혼할 남자에게 배신을 당한 현수 역시 세진처럼 지금 삶이 고달프고 힘든 건 마찬가지였는데 그녀가 경찰로서의 정의감을 버리고 누군가의 편을 들어주면서 한 사람의 삶이 크게 달라지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스스로도 위로를 받게 된다. 그러니까 현수의 선택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됐다. 그 빛은 분명 옳고 그름보다 위대했다.

<내가 죽던 날>을 보면서 난 <다크 나이트>와 <나의 아저씨>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걸 문득 깨닫게 됐다. 살인전과를 가진 지안은 흔히 말하는 옳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한강 다리 위로 내몰린 동훈의 어둡고 고달픈 삶에 한 줄기 빛이 됐다. 그건 지안에게 동훈도 마찬가지였다. 악당들을 소탕하기 위해 법을 함부로 어겼던 배트맨은 흔히 말하는 선(善)이 아니다. 그는 온갖 범죄와 부패로 어둠이 짙게 깔린 고담시의 하늘에 외롭게 솟구친 한 줄기 빛이었다. 다들 영웅들이었다. 2020년 11월12일 개봉. 러닝타임 116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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