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지변(皆知邊)·계변(戒邊)의 정체성
개지변(皆知邊)·계변(戒邊)의 정체성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1.02.15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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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을 일컫는 신라 시대의 지명 중에 ‘개지변(皆知邊)’이 있다. 개지변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1997년, 필자는 울산에 정착하면서 울산문화원(현 남구문화원) 회원이 됐다. 그 인연으로 울산의 읍지(邑誌) 『학성지(鶴城誌)』(權相一, 1749)를 접하게 되어 기뻤다. 맨 처음 풍속(風俗) 편을 펼쳐보았다. 상무예(尙武藝), 매귀악(煤鬼樂), 마두희(馬頭戱), 영등신(盈騰神) 등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있어 울산의 풍속을 공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그러나 풍속 편 첫머리에 “무예를 숭상하고 성품이 강하고 굳세어 문화를 일으키고 쉽게 교화할 수 있다.(河演의 記와 ?出輿地勝覺)”라는 글을 읽고 궁금증이 생겼다. 상무(尙武)는 무예(武藝)를 중히 여겨 숭상한다는 의미다. 이에 반해 상문(尙文)은 문예(文藝)를 귀히 여겨 높이 받드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왜 울산을 ‘상무예의 고장’이라 불렀을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게 됐다.

먼저 ‘개지변(皆知邊)’의 정체성에 관한 선행 연구를 찾았다. 이유수의 ‘변방의 신산(神山)’ 설, 장세동의 ‘갯가 또는 갯가에 있는 성(고을)’ 설, 이창업의 ‘계변을 늘여서 부른’ 설 등 세 가지였다. 필자는 ‘개지변(皆知邊)과 계변성(戒邊城)의 변별성’(울산제일일보, 2018.4.16.)이란 글을 통해 세 가지 설에 추가하여 개지변의 습지 설과 계변의 군사적 역할 설을 제시했다. 그 바탕은 울산의 역사적 지명인 굴아화(屈阿火), 개지변, 계변(戒邊), 울주(蔚州), 학성(鶴城) 등이었다. 기고문의 핵심은 개지변과 계변의 정체성에 대한 접근이었다. 즉 “개지(皆知)는 자연상태의 넓은 가장자리, 개활지, 평야 등의 의미로 수자원이 풍부한 자연환경적 지역의 이름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계변(戒邊)은 군사적 역할과 유관한 이름일 가능성이 크다.”였다.

기고 후, 기고문을 다시 읽고 생각해보았다. 계변이 군사적 의미가 담긴 지명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개지변이 습지라는 것은 너무 성급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기회가 있으면 다시 정리하기로 마음먹은 지도 어느덧 3년이 지났다. 자료를 찾던 중 「신라 신문왕대 개지극당의 창설과 통일국가의 위상 강화」(한준수,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를 읽게 됐다. 한준수는 〈탐라문화 63권〉(2020년 2월)에서 “신문왕대에 창설된 개지극당은 전투 목적이 아닌 정치적 필요에 의해 생성되었으며, 사료에서 확인되는 극(戟)의 존재와 기능의 변화는 극이 의장·의례 병기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극을 사용하는 개지극당은 의장(儀仗) 기능을 수행하는 군단의 등장이다.”라고 하여 개지극당의 기능과 역할이 변천됨을 알 수 있었다. 이 논문은 개지변의 정체성에 대한 궁금증의 불씨를 되살려 주었다. 개지변의 정체성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자연환경 습지’ 설에서 ‘개지극당(皆知戟幢)의 영향’ 설로 무게중심을 옮기게 됐다. 먼저, 개지극당이 무엇인가?

<삼국사기> 지(志) 직관(職官) 하(下) 무관(武官) 편에 ‘개지극당(皆知戟幢)은 신문왕(神文王) 10년(690)에 처음 두었다. 옷 색깔은 검정, 빨강, 흰색이다. 개지극당감(皆知戟幢監)은 총 4명으로 왕도(王都)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개지극당의 설치와 편제, 지휘부의 조직을 밝힌 글이다. 개지극당의 이름은 극(戟)을 통해 알 수 있다. 극은 창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창(槍)이다. 당(幢)은 군대를 상징하는 깃발을 말한다. 결과적으로 개지극당은 창을 주 무기로 편제된 군대를 말한다. 어찌 보면 울산 남목의 마성(馬城), 병영(경상도 좌병영) 등도 울산을 무예의 고장으로 연상시키는 데 한몫한 셈이다.

‘울산 사람들이 무예를 숭상한다’는 서술은 관풍안(觀風案)과 하연(河演)의 기(記) 그리고 여지승람(輿地勝覺)을 통해 『학성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학성지의 ‘상무예’는 개지변의 정체성을 가리키는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또한 계변의 정체성은 개지변에서 확대·발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개지변성, 계변성의 성(城)은 기능과 장소가 아닌 지역의 개념일 것이다.

신라의 군진(軍陣)은 본래 변경의 수비를 위해 육지에 설치되었다. 하지만 해적들의 해상 노략질이 심해지자 이에 대비해 해안의 요지에도 군진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특히 개지극당의 주둔지가 남해안 지역이라는 사실은 개지극당의 중요한 역할이 해로(海路)를 통한 외적의 침임을 방어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울산에는 신라의 해로·육로(陸路)와 관련된 방어체제가 있었다. 바로 해문(海門) 지킴이인 개지변(皆知邊)과 육문(陸門) 지킴이인 관문(關門)이 그것이다. 해문의 중심은 반구동이었고, 육문의 중심은 녹동이었다. 이를 ‘개지변성’과 ‘관문성’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계변’이란 말은 해문과 육문을 통칭하는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 조류생태학박사·철새홍보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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