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객’ 김계화 선생을 떠올리며
‘방문객’ 김계화 선생을 떠올리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1.02.01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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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종(1939 ~ )의 시 ‘방문객’을 소개한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정현종의 ‘방문객’)

1986년, 국악인 김계화(金桂花, 1925∼200 0) 선생이 방문객으로 울산을 찾았다. 울산 국악사(國樂史)로 볼 때 변화의 마중물이었던 분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왔기 때문이다. 울산은 당시만 해도 특별한 국악 전승 문화예술이라곤 내세울 것이 없었다. 열악한 울산의 국악 환경에 단비 같고 노숙(老熟)한 국악인의 방문은 ‘획기적’이란 표현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선생은 여동생 김명심과 함께 왔다. 둘은 울산향교 근처에 〈울산국악원〉을 열었다. 부산에서 12년, 마산에서 10년을 돌고 돌았다. 예술인 대부분이 그러하듯 그녀도 역마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인생 육십이 년을 여대(女戴=‘여성은 짐을 머리에 인다’는 말뜻)하고 반겨줄 사람도 기다리는 임도 없는 학성 땅 울산에서 인생의 마지막 정을 붙이고자 찾아왔다. 그러나 울산의 국악인은 물론 울산시민도 선생을 알아보지 못했다. 국악계의 너무 큰 산을 만나서일까?, 아니면 몰라서였을까?

연극평론가 구희서(具熙書·1939∼2019)는 『한국의 명무』(한국일보사, 1985)에서 김계화(金桂花, 1925년 7월 24일생) 씨에 대해 “그의 살풀이는 긴 장단에 긴 수건을 들고 수건 춤을 추다가 허리를 질끈 동여매고 잦은 가락으로 넘어가 소고를 들고 노는 순서가 한판으로 짜여진 아담한 소품(小品)이다……. 정 많은 성품이 그대로 춤에 고운 모습으로 나타나고….”라고 서술했다. 그의 부친 김봉기 씨는 호적(胡笛) 명인으로 국악계에서 일생을 보냈다고 전한다. 다행히 그의 딸이 집안 내림 재주를 이어받아 판소리, 무용, 기악을 두루 배워 어머니의 예능을 이어가고 있다. 구희서는 “국악 속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고, 일생을 국악 무대와 그 주변에서 살아오면서 얻어진 장단과 흥이 그의 살풀이를 만들어 냈고, 그의 귀여운 여인의 개성이 춤 속의 귀여움으로 드러나고 있다.”라고 딸을 소개했다.

1993년, 열일곱 여고 1년생인 엄영진은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 그날도 흔들리는 차창에 기대어 교가의 한 소절 “창공에 장관 펴는 학들의 군무 보소.”를 맘속으로 읊조렸다. 향교 부근 정류소에 버스가 멈추었다. 그때 어디선가 살풀이 시나위 장단이 귓가를 스쳤다. 그는 11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무용학원에 다녔기에 귀에 익숙한 장단이었다. 그는 출발하려는 버스를 세워 황급히 내렸다. 시나위가 들리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장단은 귀에 가까이 크게 들렸다. 콩닥거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울산국악원의 문을 당겨 열었다. 김계화 선생님과의 첫 만남이었다. 열일곱 인생이 예순둘의 방문객을 운명처럼 만난 것이다. 그 후 영진은 손녀 같은 막내 제자가 되었다.

김계화 선생은 필자와도 무관하지 않다. 선친 김덕명(1924∼2015,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 예능 보유자)과는 부산에서 교류했기 때문이다. 마산에 계실 때도 만났다. 1997년 필자가 울산에 왔을 때 만날 수도 있었지만 내 코가 석 자인 때라 찾아뵙지 못했다. 그때의 아쉬움은 지금도 그러하다. 그 후 편찮으시다, 울산에 안 계신다, 병원에 입원하셨다 등 안타까운 소식만 들렸다.

선생은 〈방문객〉의 내용처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울산에 가져온 진정한 방문객이었다. 후배국악인은 선배국악인을 통해 법고창신(法古創新)과 온고지신(溫故而知新)을 할 수가 있다. 과거의 권번(券番) 문화를 들을 수 있고, 현재를 이야기하면서 미래의 국악 동량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가 다양한 예술은 먹감나무 무늬처럼 아름답다. 산전수전 다 겪은 인생의 상처가 아름다운 무늬로 변했기 때문이다.

2000년 12월, 선생은 울산 태화로타리 부근 한 병원에서 여동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임종했다. 언니의 주검은 울산 공설화장장으로 운구되었고, 혼은 하늘로 백은 땅으로 각각 흩어져 혼비백산했다. 몇 조각 남은 유골은 여동생이 수습[拾骨]하여 모시고 갔다. 그 후로 동생은 어느 곳에 언니의 유골을 어디에다 산골(散骨)했는지 알 수 없고 본인마저도 소식이 끊어졌다고 전한다.

예술인의 역정(歷程)에는 시대적 인생의 희로애락이 다 녹아 있어 도서관과 다를 바 없다. 후회와 회한 그리고 아쉬움은 상대가 살아있을 때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 감사할 줄을 모른다. 다만 대상이 떠나고 죽었을 때 기억할 뿐이다.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조류생태학박사·철새홍보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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