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 - 사랑은 이별로 완성된다
화양연화 - 사랑은 이별로 완성된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1.01.28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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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화양연화' 한 장면.
영화 '화양연화' 한 장면.

남자는 유부남이었다. 또 여자는 유부녀였다. 둘은 같은 날 같은 아파트로 이사를 오게 된다. 이삿짐을 옮기고 짐을 정리하느라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둘은 가벼운 눈 맞춤과 함께 첫인사를 한다. 남자에겐 아내가 있었고, 여자에겐 남편이 있었지만 화면 속에서 그들의 모습은 좀처럼 볼 수가 없다. 어쩌면 그때부터 이미 시작된 건지도 모른다. 화영연화는. 제목인 화양연화(花樣年華)는 '가장 아름답고 찬란했던 시절'을 말한다.

그 후로 남자와 여자는 좁은 아파트 복도에서, 혹은 아파트 근처 길에서 종종 마주친다. 이젠 가벼운 대화까지 주고받는 사이가 된 둘은 어느새 서로가 공통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여자는 남편의 잦은 출장을, 남자는 점점 늦어지는 아내의 귀가시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것. 그런 어느 날, 남자의 넥타이와 여자의 가방이 각자 배우자의 것과 같다는 것까지 서로 알게 된다. 절망에 휩싸여야 할 둘이었지만 왠지 그들의 표정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남자의 이름은 차우(양조위)였고, 여자의 이름은 첸(장만옥)이었다. 그리고 대책회의를 핑계로 이제 남자와 여자는 자주 만나게 되고, 점점 사랑에 빠지게 된다.

사랑이란 때론 가랑비에 옷이 젖듯 서서히 빠져들기도 한다. 그게 첫눈에 반하는 사랑보다 더 무서운 건 영혼까지 탈탈 털리지만 본인은 모른다는 것. 시간의 점착력이란 길수록 무르익기 마련이어서 사랑인 줄 모르고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눈가엔 눈물이 고여 있다. 차우와 첸의 사랑이 그랬다.

허나 몸을 섞지는 않았다. 차우도, 첸도 그것까지 원하진 않았다. 그저 서로에게 작은 위로가 되고자 했다. 마침내 차우를 깊이 사랑하게 된 첸이 그에게 말한다. "우린 그들과 다르니까." 하지만 정작 첸이 주로 입었던 치파오나 둘이 함께 한 공간은 온통 붉은 색이었다. 그렇게 그들의 사랑은 몸 밖으로 벗어나 있었다. 대신 세상 곳곳이 화양연화였다.

그랬다 해도 남자와 여자는 결국은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내. 세간의 시선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둘의 사랑도 기울 수밖에 없었다. 사랑이 식었다는 게 아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남자가 여자를 위해 헤어져야 한다는 걸 알았던 거다. 하지만 남자는 여자의 마음이 다치는 게 싫었고, 해서 그녀를 위해 이별연습을 해준다. 하지만 여자는 그런 남자의 품에 안겨 진심을 다해 울어버렸다. 그리고 헤어진 둘은 남자가 먼 곳으로 떠나면서 일상으로 돌아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허나 이별이 남긴 자리엔 그리움이 계속 남아 있었다. 그렇게 수년이 흘렀지만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잊지 못했다. 그랬다. 둘의 사랑은 식어서 끝이 난 것도, 그렇다고 크게 싸운 뒤 안 좋게 헤어진 것도 아니었다. 오롯이 그리움만을 간직한 채 끝이 났다. 명작이다. 

좀 더 시간이 지난 뒤 여자는 아이를 데리고 그때 그 아파트를 다시 찾는다. 역시나 남자는 없었고, 가장 아름답고 찬란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만 남아 있었다. 그러고 몇 년 뒤 캄보디아로 간 남자는 앙코르와트 사원을 찾는다. 12세기 크메르 제국의 유적 가운데 앙코르와트 사원은 가장 잘 보존된 세계적인 명작이었다.

사랑은 이별로 완성되지만 그건 자주 엉망진창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남자에게 있어 그때 그 사랑만큼은 달랐다.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시절에 끝이 난 뒤 그리움으로 잘 보존된 사랑이었다. 마치 앙코르와트 사원 같았던 것. 해서 남자는 점점 유적이 되어가는 자신의 특별했던 사랑을 오래된 사원 앞에 고백하기로 한다. 그는 사원 벽면 한쪽 귀퉁이 구멍 난 곳에 입을 갖다 댄 뒤 자그맣게 속삭인다. 하지만 남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전혀 들을 수가 없다. 그래도 짐작은 간다. 아마 이 말이 아니었까? "잘 시내시죠?" 2020년 12월24일 재개봉. 러닝타임 99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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