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새홍보관을 찾은 신부(神父)
철새홍보관을 찾은 신부(神父)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1.01.18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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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기의 마지막인 대한(大寒)이 이틀 앞으로 다가오면서 자연생태계에도 서서히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딱따구리의 나무 쪼는 소리가 자주 들리고, 박새의 울음소리가 경쾌해지고, 까치가 나뭇가지를 물고 다니는 모습이 쉽게 관찰된다. 흰뺨검둥오리, 쇠오리 같은 반잠수성 수조류들은 얼지 않은 웅덩이에 모여 순간 솟구치는 고갯짓으로 구애행위에 적극적이다. 이미 짝을 지은 개체들의 사랑행위도 심심찮게 목격된다. 어디 그뿐인가.

쇠물닭 부리는 붉은 색이 점점 더 짙어지고, 번식지를 차지하느라 쫓고 쫓기는 일이 일상이 됐다. 꽁지깃을 치켜세운 장끼가 나들이 장소를 갈대밭에서 꽃밭으로 바꾼 것도 번식시기와 무관치 않다. 선암호수공원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 잡은 매화나무는 터질 듯한 꽃봉오리를 애써 감추느라 안간힘을 쓴다. 태화강에서 겨울을 나고 있는 큰고니(한 쌍, 1개체) 세 마리는 대암댐에서 잠을 자면서 사군탄과 형제바위 보(洑)에서 먹이활동을 삼십 일째 계속하고 있다. 떼까마귀의 집단비상은 더 현란해지고 남아있는 백로들의 날갯짓에도 힘이 넘쳐 보인다. 태화강 철새들의 행동은 바야흐로 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본능의 몸짓이다.

2021년 1월 14일, 봄의 소리와 함께 울산 철새홍보관에서는 특별한 만남이 있었다. 그 이유를 잠시 소개해야겠다.

한국교육방송(EBS)의 ‘아주 각별한 기행’ 취재팀이 취재대상을 철새홍보관으로 정했다. 프로그램 이름에서도 느낄 수 있었지만, 이날 취재의 진행자는 가톨릭 사제 홍창진 신부(세례명 돈 보스코)였다. 처음 대하는 분이었는데도 신부님은 왠지 낯설지 않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제법 오래된 것이지만 그분의 자료를 인터넷에서 찾아봤다. “홍창진 신부는 사회적 약자 중의 약자인 기지촌 여성, 미혼모, 난치병 어린이들을 꾸준히 지원해 온 천주교계의 ‘에너지 맨’이라 불린다. 1989년 사제 서품을 받고 광명 본당 주임신부로 활동하고 있다.”

신부님은 현재 천주교 수원교구 기산성당 주임으로 『홍창진 신부의 유쾌한 인생탐구』를 펴내기도 했고, 언론과 방송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경력이 있는 분이다. 세례명도 알아봤다. “돈 보스코(Don Giovanni Bosco·1815~1888)는 이탈리아 출생의 가톨릭 사제이다. 고아들의 교육에 헌신했으며 살레지오회를 창립했다.”라는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취재팀 일행은 이른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꼬박 열두 시간을 함께했다. 취재는 철새홍보관, 사군탄 징검다리, 삼호대숲, 떼까마귀 조사현장, 필자의 삶의 현장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진행됐다. 그 가운데 삶의 현장 취재는 한동안 필자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취재팀은, 프로그램 특성상 취재대상이 수행자 신분이면서 전문성도 갖춘 분의 사회참여 현장을 취재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말로 설득, 필자의 이해를 기어이 구하고 만다.

책상 앞에서 자료를 정리하는 모습을 취재하던 신부님의 눈에 책상 위에 펼쳐진 성경책이 들어왔다. 이를 본 신부님은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스님이 성경을 읽으십니까?”라고 물었다. 필자가 말을 받았다. “스님이 성경을 읽으면 법문이 다양하고 풍부해집니다. 반대로 신부님께서 불경을 읽으시면 설교가 다양해지고 풍부해지실 겁니다. 어찌 성경을 읽지 않고 불경을 읽지 않겠습니까?”라고 망설임 없이 답했다. 신부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인생나이 육십이 넘고 수행나이 사십 년에 접어든 둘은 서로 통하는 데가 있었다. 옛것에 의지해서 현재를 바라보지 않고 늘 새로운 것과 대면하려는 젊은 마음가짐이 특히 그랬다. 하느님과 부처님의 분노, 즉 거룩한 분노의 부재가 안타깝다는 사실에도 서로 공감을 나누었다. 변화를 싫어하는 마음가짐, 익숙한 위치에서 과감히 떠나기를 거부하는 망설임, 당연한 세계인 줄로 잘못 아는 착각, 악착같이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분위기 등 대상과 조직을 굳이 거론하지 않아도 둘은 서로 공감으로 하나 될 수 있었다.

취재도중 가끔씩 나눈 신부님과의 대화에서 공감하는 부분이 참 많았다.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이 가져다주는 반가움과 설렘과 신비로움, 그리고 삶과 수행 과정에서 체험할 수 있었던 존재와 가치의 후광(後光)과 광배(光背)에 대한 인식의 공유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겸손과 배려 앞에서는 오직 소통과 공감만이 있을 뿐이었다. 둘 사이에 시비(是非)와 주장(主張), 거만(倨慢)과 교만(驕慢)은 없었고 화기(和氣)와 애애(靄靄)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곧은 마음은 득(悳)이 되기에 신부님과 격의 없이 소통할 수 있었다. 익숙한 조직에서의 기득권을 과감히 내려놓고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기 위한 떠남은 성숙함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이삭이 그랬으며, 요셉의 삶도 그랬다. 서로는 말의 이음줄로 소통할 수 있어 유익했다.

그렇다. 새의 탄생은 알을 깨고 나옴으로써 시작된다. 이번 취재는 철새홍보관뿐만 아니라 필자의 수행에 다양성의 옷을 입혀 주었고, 사회적 참여에 대한 보람과 자긍심을 느끼는 실마리가 돼 주었다.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조류생태학박사·철새홍보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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