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진사댁 경사’
‘맹진사댁 경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12.06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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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구? 갑분이가 시집을 간다구?”

아직도 기억에 남는 영화 속 대사는 이 한마디뿐. ‘맹 노인’ 역으로 나온 희극배우 김희갑(1922~1993) 선생 특유의 코믹 연기가 그 한마디라도 남기게 만들었을까.

늦가을 늦은 밤, TV 채널을 돌리다 잠시 시선을 멈추었다. 국민방송의 ‘KTV시네마’ 속 장면이 왠지 눈에 익은 듯했다. 시선은 다시 화면 속으로 미끄러지듯 빨려 들어갔다. 옛 기억도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청소년기에 보았던 ‘맹진사댁 경사’(孟進士宅 慶事)라는 총천연색 영화였다.

간간이 화면이 흔들리면 곧바로 뒤이은 자막이 그 어간을 메웠다. “원본 필름의 보존상태가 양호하지 못하여 화면이 불안정한 점, 양해 바랍니다.” 언제 나온 영화일까. 그 해답도 자막이 말해줬다. 해설도 섞였다. “감독 이용민, 제작년도 1962년.…돈으로 벼슬을 산 맹 진사가 딸을 시집보낼 때가 되자 세도가의 아들을 사위로 맞으려 갖은 애를 쓰는 과정을 그린 풍자해학극이다.”

등장인물은 김희갑 선생만이 아니었다. 주연급인 김승호(맹 진사 역), 최은희(이쁜이 역) 선생 말고도 구봉서(삼돌이 역), 이빈화(갑분이 역), 김진규(미언 역) 선생과 최남현·양석천 선생도 같이 이름을 올렸다. ‘주연 같은 조연’이란 찬사가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 이젠 그럴 수도 없다. 모두 고인(故人)인 탓이다. 영화 포스터에서는 운보(雲圃)로 보이는 이름 ‘金基昶’(김기창)도 만날 수 있다. ‘미술(색채)감독’이란 직함이 딸렸다. ‘해외수출을 목표로 한 획기적 초대거작(超大巨作)’이란 표현이 흥미를 돋운다.

영화에 매료되는 사이 점점 짙어지는 건 격세지감(隔世之感). 지금은 듣고 보기 힘든 용어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맹추, 맹꽁이, 얼간이에다 병신, 뚱보, 새대가리, 절름발이, 쩔뚝발이까지… 입 밖에 꺼냈다간 혼쭐이 날 수도 있을 법한 용어들이 별 거리낌 없이 구사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게 신기했다.

주고받는 대사들도 감칠맛을 더했다. “종년한테 장가를 들어?” “상전은 종놈에게 일구이언해도 괜찮은가요?” “종이라고 놀리는 양반은 제아무리 상전이라도 개떡이야요.” “이 발칙한 놈!” “어떤 놈이냐? 내 손녀사위라는 병신놈 말이야.” “자기 딸을 종년과 바꿔먹고…”

‘맹진사댁 경사’는 일제 말기인 1943년 4월, 작가 오영진(1916~1974)이 ‘국민문학’에 일본어로 발표한 시나리오. 그해 태양극단에 의해 초연됐고, 1956년 동아영화사가 흑백영화로 제작, 우리나라 최초로 참가한 ‘제4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에서 특별 희극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우리 고대설화 ‘뱀 신랑’에서 소재를 구해서 쓴, ‘탄탄한 희극적 구성과 해학이 돋보이는 텍스트’란 평이 따르기도 했다. 영화로는 두어 차례 ‘리메이크’ 과정을 거쳤다.

영화 ‘맹진사댁 경사’에 대한 네티즌들의 반응도 흥미롭기는 마찬가지. “정말 재밌다. 인간의 희로애락은 시간을 초월하는 듯!! 2번이나 리메이크된 명작”(2016.09) “명예와 돈을 좇는 요즘도 천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 넘쳐나는데 진정한 순정의 마음을 가진 신붓감은 예나 지금이나 귀하고 어렵다. 감동과 의미를 모두 던져주는 영화.”(2018.03) “아주 좋습니다. 예전의 배우들 너무 잘합니다. 희극적 요소와 우리네 문화도 잘 보여주어 좋아요.”(2012.07).

그러나 그들은 지금 가고 없다. 영화이론가로 출발한 작가 오영진도, 한 시대를 풍미한 영화배우 김승호·최은희 선생도, 김희갑 선생도 세월을 따라…. 하지만 그들은 살아있다. 더러는 흔들리는 화면 속에서, 더러는 희미해진 기억 속에서, 아직도.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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