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실이는 귀엽기라도 하지-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찬실이는 귀엽기라도 하지-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 이상길
  • 승인 2020.12.03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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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한 장면.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한 장면.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찬실(강말금)은 원래 영화 프로듀서였다. 그런데 새 작품 제작에 돌입하기 직전, 감독이 회식자리에서 돌연사를 하면서 제작이 중단되고 만다. 이후 영화제작 일까지 끊겨 버려 찬실은 살 길이 막막해진다. 배고픈 영화 일에만 매달리다보니 여태 집도, 남자도 없었던 찬실은 결국 산동네로 이사를 하게 되고, 생계를 위해 평소 친하게 지내던 배우 소피(윤승아)의 집에서 가사도우미를 하며 살길을 도모한다. 참, 찬실의 나이는 이제 막 마흔을 넘겼다.

인생에서 마흔이라는 나이가 의미 있는 건 그 때부터 슬슬 뒤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마흔을 넘기면 그렇다. 잘 태어나거나 아주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면 보통은 먹고 사는 문제에 치여 10대나 20대 때부터 갖기 시작한 꿈이나 목표를 계속 갖고 가기가 부담스러워진다. 결국 뒤돌아볼 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면 문득 소싯적에 열정을 바쳤던 일에 회의감이 밀려들기도 한다.

찬실이 그랬는데 오직 영화에 대한 열정 하나로 사십 평생을 살아왔지만 그녀에겐 지금 남은 게 아무 것도 없었다. 가장 후회되는 건 역시나 연애. 해서 그녀는 소피집에서 가사도우미를 하다 알게 된 김영(배유람)에게 들이대기 시작한다. 말쑥하게 생긴 김영은 소피의 불어 가정교사였다. 허나 김영도 자신을 좋아한다고 믿었건만 찬실은 그만 보기 좋게 퇴짜를 맞는다.

그런 찬실에게는 산동네로 이사하고 난 후부터 자꾸만 헛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설픈 장국영(김영민)이 귀신처럼 자꾸 나타나 주변을 맴돌았던 것. 장국영은 영화 <아비정전>에서 맘보춤을 출 때 입었던 런닝 차림으로 돌아 댕기며 찬실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특히 그는 찬실을 붙들고는 “찬실씨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알아야 행복해져요”라고 자주 말했다. 참고로 찬실은 영화에 대한 꿈을 키우던 학창 시절 홍콩배우 장국영을 좋아했었다.

그랬거나 말거나 되는 일은 없고, 김영에게 퇴짜까지 맞은 찬실은 자신의 삶이 너무 한심해 오랜 세월 보물처럼 소장하고 있던 영화 관련 자료들을 모조리 갖다 버린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던 주인집 할머니(윤여정)는 찬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래 쥐고 있으면 뭐해. 버려야 또 채우지.”

그리고 얼마 뒤 슬픈 찬실 앞에 장국영이 다시 나타난다. 눈치 깠겠지만 장국영은 사실 찬실 자신이었다. 그러니까 자신의 삶을 한심하게 여긴 찬실이 스스로 만든 넋두리였다. 아무튼 그런 장국영에게 찬실은 이렇게 말한다. “장국영씨. 지금보다 훨씬 더 젊었을 때 저는 늘 목말랐던 거 같아요. 사랑은 몰라서 못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만은 나를 꽉 채워줄 거라고 믿었어요. 근데 잘못 생각했어요. 채워도 채워도 그런 걸로는 갈증이 가시지가 않더라구요. 목이 말라서 꾸는 꿈은 ‘행복’이 아니예요. 저요 사는 게 뭔지 진짜 궁금해졌어요. 그 안에 ‘영화’도 있어요.” 일찍이 장국영도 찬실에게 “외로움에서 비롯된 사랑은 진짜가 아니다”고 말했었다. 아무튼 장국영은 그날 밤 찬실을 안아주며 이렇게 말한다. “제가 멀리 우주에서 응원할게요.”

마침내 깨달음을 얻은 찬실은 며칠 뒤 산동네 집으로 놀러 온 소피에게 이런 말을 한다. 환한 보름달 아래 찬실의 팔짱을 끼고 걷던 소피는 “언니. 오늘은 정말 달에게 맹세하고픈 깊고 깊은 겨울밤이야”라고 하는데 그 말에 찬실은 이렇게 말한다. “맹세는 하지 마라. 달도 변하는데 뭔들 안 변한다고.”

그날 밤 달빛 아래에서는 소피 외에도 자신에게 퇴짜를 놓았던 김영과 같이 영화 일을 하던 동료들이 함께 있었다. 그들은 찬실이 보고 싶어 험한 산동네까지 왔던 거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 같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찬실이는 참 복도 많지.

그러거나 말거나 찬실이는 귀엽기까지 하다. 마흔을 넘겼는데도. 솔직히 이 영화가 재밌는 이유는 찬실의 귀여움이 8할을 차지한다. 그러니까 찬실 역을 위해 특수 제작한 ‘강말금’이라는 무명 배우가 아니었으면 영화가 못 살았다는 말씀. 헌데 그게 좀 의도된 듯한데 사실 사람이 마흔을 넘어서까지 귀엽긴 쉽지 않다. 어렸을 땐 누구든 다 귀엽지만 커 가면서 욕망과 시기, 질투, 혹은 분노가 MSG처럼 가미되면서 다들 무서워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찬실은 여전히 귀여웠고, 해서 장국영도 일찍이 “찬실씨는 여전히 멋진 사람”이라고 했었다. 그래서였을까? 영화가 끝나고 난 뒤 스스로에게 묻게 되더라. ‘난 지금 얼마나 귀여울까?’ 2020년 3월5일 개봉. 러닝타임 96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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