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그림과 그림문자
바위그림과 그림문자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11.29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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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이 나면 박물관을 찾는 버릇이 최근에 생겼다. 지난주엔 지인과 함께 울주군 두동면의 암각화박물관을 한 달 열흘 만에 다시 찾았다. <바위의 기억, 염원의 기록> 전시회(2020년11월2일~2021년 4월25일)를 위해 내부단장을 새롭게 마친 2층 체험공간의 모습과 1층 전시공간의 안내판 글귀가 몹시 궁금하던 차였다.

해설사도 시인한 안내판(‘청동기시대 암각화와 유물’) 첫 문장의 오류는 40일이 다 차도록 바뀌지 않고 그대로였다.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가 처음 발견했다는 시점이 ‘1970년 12월 25일’인 줄로 아는데 “청동기시대에 발견된 암각화”라니…. 아마도 귀띔해줄 용기가 없었다는 말이겠지. 어쨌거나 박물관장은 금요일인 이날도 ‘부재중’이어서 상견례는 다음 차수로 미뤄야 했다. 국보 147호 ‘천전리 각석’이 전시회 홍보전단에는 어찌하여 ‘천전리 암각화’라고 적었는지도 묻고 싶었으나 그런 요행은 단념하는 것이 차라리 맘 편할 것 같았다.

궁금한 게 하나 더 있었다. “을사년에 사탁부 갈문왕이…(乙巳~ 沙啄部 葛~ 文王~)” 따위의 글을 남긴 천전리 각석의 해석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일본어 ‘ゆ(유)’자가 느닷없이 끼어든 이유가 무엇인지라는 의문부호가 그것. 하지만 박물관 안의 안내문이든 울주군 천전리 현장의 해설문이든 어디에도 그런 마음씀씀이는 엿볼 수 없어 아쉬웠다. 탐문 끝에 대구C대 G교수의 작품이라고 귀띔으로 안 것은 나중의 일.

그 이후 소위 ‘전문가’에 의한 추가연구는 거의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둔기로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실제로 그랬다면, G교수의 지론이 금과옥조(金科玉條)라는 얘기가 아닌가.

또 다른 물음표가 꼬리를 물었다. ‘암각화’(巖刻畵)와 ‘각석’(刻石)의 차이점은? ‘암각화학계의 중론’이라며 지인이 들려준 풀이가 제법 그럴싸했다. “암각화는 바위를 석영이나 수정 같은 석기로 쪼아서 새긴 그림이고, 각석은 쇠붙이 따위로 글씨나 그림을 새긴 바윗돌이라 하겠지요. 울산에서 석영은 안 나도 수정은 나니 그런 걸 사용했을지도 모르지요.” 여러 해에 걸쳐 독학으로 파고든 탓에 애착이 누구보다 강한, 그러면서도 ‘비전문가’ 소리만 들어온 그는 천전리 각석에 새겨진 것들이 단순한 그림은 아니라고 했다. 그림문자(=그림글자), 즉 고대의 한자와 같은 ‘회화문자(繪畵文字)’라는 지론을 지금도 버리지 않고 있다.

나들이에 나설 때 그와 주로 만나는 곳은 남구문화원 안뜰이다. 이번 나들이의 출발지도 그곳이었다. 무심코 지나치던 문화원 입구의 너럭바위 한 점이 이날따라 시선을 사로잡았다. 사람 손길이 닿은 지 오래고 먼지가 뿌옇게 쌓여 윤곽이 흐릿하게 보여서 그런지, 그저 하잘것없는 돌덩어리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건 오판이었다. 간선도로를 향한 앞면은 반구대 암각화, 뒷면은 천전리 각석을 새긴 돌조각 작품이었다. 언제 세웠는지, 누구의 작품인지 궁금한 게 한 아름이었다. 하지만 또 헛물…. 작동 여부를 알 수 없 조명등 몇 개만 덩그러니 박혀 있을 뿐 안내판 하나 찾아볼 수 없어 썰렁하기 그지없는 이 작품의 관리책임자가 누구였더라?

수소문 끝에 전임 사무국장 R씨 친구의 작품일지 모른다는 소문을 알아냈다. 초기엔 온전한 안내판 하나쯤은 있지 않았을까…? 관심의 사각지대에서 장승 대접도 못 받는 처지라면 세워둘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비아냥거림이 귀를 후벼 팔 것만 같았다. “국보 285호는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니 뭐니 해서 저 난리인 판에 참 딱하기도 하지. 누군가 자꾸 질책을 하는 것 같아서일까, 돌아서는 발길이 이날따라 더없이 무겁기만 했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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