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어놓은 시간들을 찾아서 ⑫- 피는 진한 건가
-묻어놓은 시간들을 찾아서 ⑫- 피는 진한 건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11.25 21: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묻어놓은 시간들을 찾아서 ⑫ (끝)

그런데 한 명으로 줄어든 보초가 조는 듯했다. 아까부터 술냄새가 풍겼던 보초다. 뒤에 안 일이지만 그날은 그들의 국부 호지명의 생일이었던 것이다.

한밤중인지 모두가 잠에 곯아떨어진 듯했다. 문득 자물쇠를 따는 소리가 아닌가. 머릿속이 갑자기 하얘진다. 그런데 보초가 아니었다. 못 보던 사람일 뿐만 아니라 군인차림이 아닌 민간인차림새가 아닌가. 헐렁한 양복바지에 작업복차림이다. 무슨 일일까. 어둠 속 우뚝 다가와서는 한참이나 침묵하던 그가 마침내 말을 꺼냈다.

‘멍청한 새끼…’. 우리말이다. 그러나 억양이 센 북한말이 아닌가. 게다가 다짜고짜 욕설이다. 그렇더라도 당장에는 기대고 싶다. 지옥에 떨어진 자가 고향 사람을 만난 듯도 하다. 쌍욕을 듣더라도 하소연할 여지가 있을지도 몰라. 북한말이지만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가 아닌가. 코맹맹이 소리 같은 낯선 베트남말만 들어야했던 포로 신세의 절해고도에서 우리말은 마치 구원의 메시지 같았다. 얼마나 절박하고 딱한 상황 가운데 놓여있었기에 그런 상상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말인가. 모국어란 본래 그런 것일까.

상대가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었다. ‘직방 뒈질 줄도 모르고 무슨 지랄인 게야, 이 개새끼’. 상대 앞에서 나는 개새끼였다. 뱉는 말들이라곤 깡그리 짐승에게나 건네는 말들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나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문득 그런 쌍욕이 솔깃하기도 하다. 그가 은밀한 정보를 건네고 있는 게 아니던가. 잠시 뒤면 뒈질 거라고 했다. 침이 꼴깍 넘어가는 찰라 뭔가가 개새끼 앞으로 떨어졌다. 말이 끝나는가 싶더니 그가 내 앞으로 무엇인가를 툭 던져준 것이다. 희미하나마 길쭉한 형태랑 소리로 미루어 직감할 수 있었다. 대검 훈련을 많이 해본 감각 탓이기도 하다. 짤막하나 날카로운 대검이었다. 열쇠도 함께였다. 움찔하여 얼른 철망 쪽을 바라본다. 보초가 코를 골고 있다. 그런 사이 그는 바람이듯 나가버린다. 북한말을 쓰든 말든 일단 살고 볼 일이 아니던가. 전후사연은 나중에나 생각하자.

본능적으로 탈춤을 결심하며 어금니를 물었다. 후환을 없애려면 보초부터 처리해야 한다. 잠깐만 더 그를 지켜보기로 하자. 살아나가려면 오직 이 한 순간밖에 더 있으랴. 부디 실수하지 말자. 총을 어깨에 기댄 채 코고는 소리는 여전하다. 막사 쪽도 조용하기만 하다. 철망의 문은 아직 열린 채다. 수용소 안에서 처음으로 일어나보는 순간이다. 대검자루가 부러질 정도로 오른손이 그를 움켜잡는다. 문을 나서자마자 먼저는 대검에 보초가 소리 없이 거꾸러졌다.

제발 어두울 동안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가까운 반경에서는 뛰어선 안 될 일이다. 지형을 살피며 걷고 엎드리고 포복하며 나아간다. 지뢰며 경계병들을 의식하느라 몇 백 미터를 벗어나는데도 벌써 땀이 후줄근하다. 뒤 막사 쪽에서는 아직 어떠한 인기척도 들리지 않는 것 같다. 밀림 속에서 몇 시간을 헤맸는지 모르겠다. 싱그러운 아침해가 숲속을 비춘 지도 제법 되었다. 적들의 사정권을 어지간히 벗어났을 때쯤 소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행방불명된 실종자들을 수색하러 나온 소대원들을 밀림 속에서 만난 것은 점심 때 가까워서였다.

그런데 왜 북한 사람은 뜬금없이 나타나 대검을 주어 자신을 구명해주었을까. 욕설의 의미는 또 무얼까. 나는 그들에게 반공 이념의 원수에다 일개 남조선군 졸병일 따름이지 않은가. 그들의 혈맹을 없애기 위해 여기까지 파병된 존재이기도 하다. 삼팔선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여전히 서로 적이 아니던가. 피는 이념보다 진한 걸까. 살아 돌아온 장손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도대체 수수께끼를 풀 수가 없었다. 그의 구술이 혹시 우리 국방부 차원에서는 사실로 기록되어 있을까. 아무튼 그는 북한 지도자들을 욕하곤 했지만 김일성 주석에 대해서만큼은 가급적 욕설을 삼가곤 했다.

돌아보면 장손 집안의 온갖 우여곡절은 결국 할아버지의 삶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조상에 대해 장손의 감정은 존경과 원망이라고 하는 갈등적, 이중적인 그것이었다. 그것은 민족과 개인, 또는 대의와 일상의 길이라고 하는 대립적 시각에서 느끼는 모순된 감정일 수 있다.

국내외에 걸치는 쇠부리사업가인 할아버지는 큰 재력을 바쳐서 고향의 독립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문중의 친일파를 처단했다. 막내삼촌의 부전자전적 항일투쟁사는 옥사 사건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할아버지와 삼촌에 걸쳐 지속된 이러한 민족적 대의의 길은 비록 기록으로 남은 건 없지만 집안과 문중, 또 현장적 관계자 등의 존경어린 구술사를 이룬다. 베트남전의 우연한 구명 사건이나 소고기 사건 등의 배경도 결국 대의의 길에 섰던 조상들에 닿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민족적 헌신은 개인과 일상의 처지에서는 불행이 되기도 했다. 똑똑하던 삼촌이 옥사해야 했고 할아버지는 넉넉한 재력을 독립운동에 바친 나머지 가족이며 자손에게 가난을 대대로 떠안겼다. 친일파를 처단하는 등의 민족적 대의는 오히려 살인자로 낙인찍게 하고 자손들에게까지 연좌제적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삼촌들은 남북으로 국내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고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장손은 먹고살기 위해 억척같이 살아야했다. 생사가 넘나드는 베트남전을 자원하거나 겨우 살아난 까닭도, 끝내 이른 나이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 까닭도 다 조상이 남긴 가난과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 탓일 수 있다.

장손은 육십 중반에 딱 한번 평생에 처음으로 울었다. 늘 떡대처럼 다부지고 건강하고 자존심 강한 그였다. 그렇게 울던 날은 핏줄의 역사에 깃든 의미와 그에서 비롯된 자신의 운명을 늦게나마 곰곰이 되새겨보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끝)

이노형 고래문화재단 상임이사·전 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