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의 신세타령, 나무꾼소리
포로의 신세타령, 나무꾼소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11.24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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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어놓은 시간들을 찾아서 ⑪

저녁때쯤이 되어 밥 위에 돼지고기구이를 얹은 음식이 철망 안으로 들어왔다. 철망 안에 갇힌 신세지만 끌려올 때에 견주면 포로 대접이 괜찮은 편이다. 굶주린 처지이긴 하나 식욕이 절박감을 앞서서일까. 이럴 때는 사람이란 게 참 얄궂다. 곧 죽을지도 모를 존재들이 아니던가. 식욕이라니. 우리는 깨끗이 음식을 먹어치웠다.

그러고 보면 오후 내도록 저쪽 막사들 주변으로 음식 냄새들이 제법 푸짐했다. 돼지고기에 닭고기를 굽는 냄새며 특유한 향료 냄새가 났다. 심지어 술 냄새까지 섞여 풍긴 것이다. 잔치 분위기인양 주고받는 소리들로 왁자지껄하다.

지친 몸뚱이에다 식곤증이 올만도 하지만 두 눈은 오히려 말똥말똥해진다. 여전히 긴장한 탓이었다. 그런데 동료 둘이 대화 대신 자꾸 눈길을 주고받는 게 수상하다. 사실상 낮부터 그랬다. 틀림없이 탈출 결의를 공유하는 눈치였다. 저들이 과연 눈치 채지 못했을까. 철망 밖을 향하는 눈짓이나 고갯짓으로 미루어 누가 보더라도 분명히 탈출을 모의하는 모습이다. 가능하려면 생리문제의 해결을 요청했을 때 보초가 문을 따주는 순간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겠지. 모험이다. 나는 우락부락한 몸피와는 달리 사실 소심한 편이다. 그들의 표정과 몸짓들이 너무 표시나기에 아예 거기 가담하지 않기로 했다. 애써 눈을 돌린 채 무관심한 척한다. 자칫 명을 단축시킬 무모한 짓이다. 저들 손에 운명을 맡겨두는 게 차라리 나을지 몰라. 혹시 저들의 요구에 협조할 경우 살려줄 수도 있잖을까. 내 온 신경이 두 동료와 보초들을 향하는 가운데 갖가지 생각으로 절박해진다.

밤중에 함께 불려나간 동료 둘은 철망 안으로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총소리 같은 건 없었으니 다른 걸로 처리한 걸까. 아니면. 밤중에 다른 데로 끌고 간 건가.

이제 내 차례일까.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서 피값이라도 벌어보자던 참이었는데. 동료들의 탈출 모의에 가담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저들은 나를 같은 족속으로 판단할 수도 있겠지. 그런 거와 무관하게 적군 포로라서 처단하는 건 아닐까. 돌아보면 참 한심하고 억울한 인생이다. 먹고사는 게 무어라고 낯선 전쟁터를 자원하고 결국 이렇게 가야하나. 이렇게 끝나는 건가. 고개를 숙인 채 입이 바싹바싹 마른다.

이 절박한 순간에 문득 한 노래가 머릿속에 겹쳐온다. 어린 시절 머슴살이 때부터 혼자서 부르며 가슴을 삭히곤 했던 노래다. 경상도 일대의 전승민요인 어사용, 어산영 등의 이름들로 불리는 나무꾼소리였다. 길게 빼는 선율이 특징일 메나리조의 이 어사용은 처절할 정도로 곡조가 슬프다. 길게 속을 쉬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경상도 사내들의 처신술 때문일까. 지게를 진 채 혼자 나무나 풀을 베러 깊은 산중에 들어갔을 때에나 부를 만큼 처절하다. 사설에 견주어 특히 길게 빼는 데에다 굴곡 심한 선율이 더욱 그런 울림을 자아낸다. 죽음을 애도하는 이른바 엘레지의 울림이 그에 이를까. 글쎄다.

장손은 구성지고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특히 우리소리를 잘했다. 앞서 얘기했듯이 메나리조의 모심기소리도 잘했고, 그의 회심곡은 무당까지 반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의 구성지고 간드러지는 목소리는 어사용 즉 나무꾼소리로도 심금을 울리곤 했다. 그가 참석하는 술자리는 늘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정갱이야 다리야 뼈골이 속속 쑤신다/ 울 오매가 날 와 낳았노/ 두리동산 갈가마구야 날 살리 주소/ 오호호호호// 태산 만댕이 여게 와서/ 우얘 가꼬 우얘 가꼬 우리엄마 울 아부지요/ 날 살리 주소 날 살리 주소 태산 겉은 이 짐을 지고 어찌 가란 말이요/ 눈물 가려 몬 갈시더/ 오호호호호’. 자손에게 불행을 남기길 어느 부모가 원하랴. 물정을 바라보는 눈마저 일상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자식에게는 뼈 빠지는 노동이며 가난의 원죄의 주인공은 부모일 수 있다. 하지만 하소연과 원망의 대상이 사설이 부각하듯이 꼭 부모인 것만은 아니다. 원죄는 세상이 범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열심히 산 게 죄인 부모라면 원죄는 그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나무꾼의 그런 처절한 정서는 나무꾼과 부모가 공유할 정서로서 불행을 야기한 세상을 향한 포괄적인 정서일 수 있는 셈이다. 그런 슬픔이 긴 메나리조 선율의 굴곡 심한 높낮이와 장손의 구슬픈 목소리를 빌려 증폭되고 있는 것이다.

이 소리가 반드시 슬프지만은 않아서 익살과 해학으로 슬픔을 극복하기도 한다. 앞서 모심기소리의 사례에서도 말했거니와 슬픔으로만 빠져들지 않는 것이 우리소리의 개성이다. ‘영감아 영감아 영감아 작년 칠월으 논두렁 깎다 메뚜기한티 가심 채 죽은 영감아 하/ 응아헤헤 헤헤이 허허허 어허허헤에야 어디로 갈끄나// 오라바니 오라바니 올 농사 지어서는 나 좀 여워주고 오라바니 장개는 돈 모야 가시오’. 이처럼 영감의 죽음을 노래하면서도 희비극의 정서로 노래하고, 연가를 끌어들이곤 해학을 노래한다. 절절하게 슬퍼하면서도 새로운 힘으로 희망을 찾아가고자 하는 정서적이고 의욕적인 기질이 우리 민족성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장손에게도 마찬가지다. 그의 노래와 절창은 몰락한 집안의 장손으로서 겪게 되는 애환 어린 인생사를 되돌아보는 동시에 그런 고비들을 넘고자 할 때나 일상 소시민으로서 희로애락을 맛보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가난이 죄인 탓에 이제 베트남까지 끌려와 포로 신세로 언제 처형될지 모르는 절박한 운명을 맞았다. 그런 순간에 머슴살이 시절부터 부르곤 하던 신세타령 소리가 떠오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⑫편으로 이어짐

이노형 고래문화재단 상임이사·전 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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