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 자원과 처형을 기다리는 포로 신세
베트남전 자원과 처형을 기다리는 포로 신세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11.17 19: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묻어놓은 시간들을 찾아서 ⑩-

청소년기에 머슴살이까지 해야 할 정도로 가난을 헤치며 살아가던 장손도 영장이 날아드는 나이가 되었다. 홀어머니와 남동생 둘을 가난 속에 남겨둔 채 입대해야 했고 이어서 베트남전에 자원하고자 했다. 피값인 줄 왜 몰랐으랴. 하지만 돈을 모아 가난을 떨칠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훈련 과정에서 단순무식하게 단련된 이십대 단세포의 혈기에다 잘만 하면 총알마저 피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었다.

백마부대는 베트남 남부의 나뜨랑 쪽에 배치되었다. 정찰과 소탕전 중심으로 작전이 전개되곤 했지만 적의 기습에 늘 긴장해야 했다. 무더위와 모기떼를 견뎌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몇 달이 지나 어느 정도 파병생활에 적응해갈 무렵 몇 번 경험해온 또 다른 야간 분대정찰을 나가게 되어 있었다. 베트남민족해방전선, 이른바 베트콩의 근거지 탐색을 위해 소대에서 이십여 리 정도 떨어진 마을 일대를 정찰하는 작전이었다. 밤중 안개와 가랑비 속에 긴장하며 가다가 서다가 전진해야 하는 야간행군이다. 가시덤불과 대숲 등의 밀림이며 무르팍까지 빠지는 늪을 지나야 한다. 에이전트 오렌지 즉 맹독성 제초제인 고엽제가 우거진 줄기며 잎들을 다 말려놓은 곳일까. 거치적거리는 게 한결 줄어든 구간들도 통과한다. 당시는 고엽제의 공포를 제대로 몰랐다. 어느 곳에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니 곤두선 머리카락에 땅방울이 후끈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밤중이었다.

적에게 포로가 된 건 성과 없이 작전을 종료하고 돌아오는 길에서였다. 매복기습에 당한 것이다. 적은 우리의 정찰작전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았을 수 있다. 아니면 행군 현장을 눈치 채고서 기습작전을 전개했을 수도 있다. 낮은 골짝을 지나다가 기다리고 있던 수류탄과 소총 사격에 졸지에 당하고 만 것이다. 종대 행렬의 맨 앞 분대장을 비롯한 네 명이 전사하고 말았다. 장손 본인은 대원 두 명이랑 포로가 되었다. 세 명쯤이 사지를 벗어난 듯했다.

어두움 속에서도 그들의 모습을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모두 검은 파자마에 밀짚모자를 쓴 사람들, 십여 명의 남자 베트콩들이었다. 빈틈없이 총을 겨눈 그들 앞에서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총을 든 채 엉거주춤 머리 위로 두 팔을 들어올린 상태다. 항복 자세인 것이다. 포로들의 무장을 두 명의 베트콩이 나서서 재빨리 빼앗아간다. 몽땅 무장해제당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도 사용해보지 못한 대검이며 수류탄들이었다. 그런 뒤 두 팔을 뒤로 묶고는 두세 시간 끌고 갔다. 앞에 두 명이 서고 나머지는 우리들의 뒤를 지키며 따라온다.

끌려간 곳은 그들의 임시막사들인 듯했다. 밀림 속에 대나무와 바나나 잎으로 대충 엮어놓은 막사 몇이 어렴풋하게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기다리는 인물들은 베트콩과는 전혀 다른 모습들이 아닌가. 어둠 속 희미하지만 빨강 바탕에 노랑 별을 새긴 모자마크가 달린 방서모에 짙은 초록색의 군복차림인 듯했다. 십여 명 이상으로 보인다. 주변을 오가는 군인들의 모습도 대개 그런 모습인 듯하다. 말로만 들어왔던 정규군의 베트남인민군들임에 틀림없었다. 북베트남에 기지를 두고 있는 정규 인민군이 남부지역 베트콩을 지원한다는 정보야 익히 들어왔다. 막상 부닥치게 되니 실감이 난다. 고립감이 더욱 엄습해온다. 베트콩들이 이리로 끌고 올 때만 해도 막연하나마 얼핏 탈출 가능성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무기를 가졌더라도 저것들이야 민간인들이 아니던가. 하지만 여기 정규군이라면 체계와 절도를 갖춘 훈련된 군대다. 허탈감이 밀려온다.

그들 베트남인민군은 우리들이 도착하자마자 베트콩에게서 우릴 바로 인수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포로를 정규군에게 넘겨주는 절차가 너무 간단하다. 포로와 관련한 정보인 듯 한 내용을 베트남 말로 몇 마디 주고받는 걸로 인수인계 절차가 끝나는 듯했다. 이제 베트콩들은 소리 없이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철조망으로 둘러친 좁은 수용소 안에 갇혔다. 자물쇠가 채워진 문 밖에는 총을 든 보초 두 명이 교대로 지켰다. 그들이 특별히 고문이나 협박 같은 것은 하지 않았고 수용소 안에는 포승줄도 묶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 떨어져 등진 채 앉아있어야 했고 우리끼리의 대화는 일체 금지되었다. 배가 고프지도 않았지만 언제인지도 모른 채로 아침때가 지났다. 점심때가 되어도 식사를 넣어주지 않는다. 밀림 속 그들은 매번 식사를 하는 눈치다. 음식 냄새가 밀림 속에 진동해도 사실상 우리는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다. 불안과 긴장의 연속인 탓이다.

살아날 수 있을까. 만감이 교차하는데 보초 하나가 들어왔다. 포승줄로 두 팔을 묶고는 우리를 하나씩 불러냈다. 먼저 끌려나간 곳은 한 오십 미터 건너쯤에 있는 막사였다. 군인 몇 몇과 노랑 견장을 단 장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군인 하나가 포승줄을 풀어주면서 나를 의자에 앉으라고 한다. 무척 어눌한 한국말이지만 알아들을 수는 있다. 통역군인인 듯했다. 간단한 포로 심문이었다. 소속과 계급, 군번, 나이를 물었다. 특이한 것은 한국의 주소랑 가족사항을 물은 것이다. 낯선 전쟁터에서 그런 걸 대답하려니 순간 무엇인지 모를 뜨거운 것이 목에 올라온다. 한국의 가난하고 을씨년스런 고향집에서 홀어머니는 또 두 동생들은 무얼 하고 있을까. 그러다가 흠칫 스스로를 다잡는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포로 신세다. 심문관은 물은 내용을 꼬박꼬박 기록하는 동시에 선 채로 주시하는 장교에게도 심문 내용을 알려주곤 한다. ▶⑪편으로 이어짐

이노형 고래문화재단 상임이사/ 전 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