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진 식당, 팔십년대 대학생들을 상대하다
외진 식당, 팔십년대 대학생들을 상대하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11.10 22: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묻어놓은 시간들을 찾아서 ⑨-

고려아연에 일년 남짓 다니다가 결혼도 했다. 교대근무로 직장생활을 하는 분주한 가운데 아내랑 식당업까지 겸하면서 억척같이 일했다. 대학교 옆에 친척의 공터를 얻었다. 건축비가 있을 리 만무하지만 젊은 몸뚱이가 있지 않던가. 거기에다 스스로의 완력과 기술로 블록집이나마 두 채를 지어 하나는 살림채로 하나는 식당으로 활용했다. 콘크리트 마당과 재래식 화장실도 순전히 혼자 힘으로 마련했다.

식당의 고객들은 주로 대학생들이었다. 콘크리트 마당에는 평상도 서너 개나 놓일 정도로 많은 손님들이 앉을 공간을 확보했다. 아직 개발이 안 된 외진 곳에 하나밖에 없는 식당이라서 한꺼번에 백 명이 넘는 학생 단체손님들이 몰려올 때도 있었다. 국수를 삶고 부침개를 굽고 술을 팔았다. 그야말로 삼백육십오 일을 노는 날 없이 장사했다. 찬거리나 호박전, 정구지전 등의 재료는 대부분 뒷밭에서 직접 가꾼 것으로 충당했다. 직장에서 돌아와 밭농사를 돌보고 식당일도 도우는 등 한결같이 일한 끝에 아파트도 장만하고 어느 정도 적금도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스무 몇 해 동안 식당일을 감당해온 아내는 육십 중반이 안 되어 어깨병 등의 갖은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건강을 챙겨보지 못한 채 장사에만 골몰한 탓이다. 두 딸을 남들처럼 보살피지 못한 것도 늘 한스러운 일이다. 다행히 두 딸 모두 서울과 울산에서 어엿한 직장인으로 생활하게 되었다. 장손은 간절하던 아들이 없는 탓에 더러 소주잔도 들곤 했다. 그러던 차에 가장에게 불행이 닥쳤다. 퇴직한 지 서너 해 만에 중병이 발병하고 만 것이다. 겨우 육십 중반을 넘어서는 나이였다. 시기를 놓친 폐암이었다. 한평생 노동으로 단련된 다부졌던 장손도 병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대기업 직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의 폐암은 오랜 용광로 현장에서 얻은 산업재해일지도 모른다.

말했듯이 이 식당의 손님 대부분은 바로 울타리 밖에 빤히 보이는 학교의 대학생들이었다. 학교와 식당의 경계선인 울타리에는 철망이 둘러진 가운데 군데군데 편백이나 사철나무, 소나무 숲이 대신했다. 무엇보다도 교문 쪽으로는 하나밖에 없는 외진 식당인 탓에 학생들이 길 건너편 식당 대신 곧잘 이 식당으로 몰려들곤 했다. 대학교에 수십 개의 학과나 동아리들이 있듯이 여기 오는 학생들의 개성도 다양했다. 좋아하는 음식도 다양하여 칼국수며 라면, 잔치국수, 호박전과 정구지전 등을 제각각 즐기곤 했다. 체육과나 체육동아리 등의 학생들은 이 식당의 술을 청년들의 체력만큼 팔아주었다.

팔십년도 이후에는 운동권 학생들도 단골이 되어 갔다. 폭발할 듯한 가슴들을 다독거려줄 수단들이 식당 안에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막걸리와 소주가 있으니 한과 분노를 거기서 풀어내고 고성방가를 목청껏 합창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운동권 가요들은 고래고래 거칠었지만 이십대 달궈진 가슴들을 덥혀주고 달래주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숲 속 외진 식당이기도 하니 누가 뭐라겠는가. 통일과 반독재를 맘껏 외칠 수 있는 뜨거운 거점이기도 했다.

학교 안에는 스피커가 그칠 날이 없었고 울타리 안팎으로는 최루탄이 날아다녔다. 마침내 교문이나 울타리 밖으로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고 백골단과 학생들은 쫓고 쫓기며 뒤엉키곤 했다. 대한민국 대학가 일반의 풍경이리라.

청사에는 아득한 시절부터 국난 때마다 의병투쟁이 이어지곤 했다. 죽을 줄을 몰랐고 가정의 파괴를 몰랐으랴. 일제에 강점당한 뒤에는 삼일운동, 광주학생운동 등으로 청사를 이어갔다. 그 중심에 늘 학생들이 있어 왔다.

식당 주인인 이 사나이도 그 시절 대학가의 풍경 속에 함께 놓여야 했다. 학생들이랑 백골단들의 일진일퇴가 자신이 애써 가꾼 뒷밭에서도 전개되곤 하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고추모랑 채소모가 꺾이고 가을학기 때는 배추 무 모종들이 뭉개져야 했다. 떡대 같은 사나이의 입에서 욕설이 쏟아지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인에겐 쫓는 경찰도 미웠지만 학생들이 더 미웠다. 공부는 안한 채 사흘이 멀다 하고 데모나 해대는 빨갱이 새끼들이 아니던가. 비싼 학비를 쓰면서 데모질이나 하는 걸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베트남전의 용사가 아니던가. 농사짓는 밭에 뛰어든 학생도 경찰도 주인의 욕설에 미처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사나이는 때로 협박용 몽둥이도 휘둘렀다. 본래가 험상궂고 다부진 표정과 몸피였기에 그의 욕설과 몽둥이는 위협적으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그러기에 학생들에겐 졸업 후에도 어지간한 반공투사로 기억되는 주인이었다. 하지만 데모가 끝난 뒤면 학생들은 다시 식당을 찾곤 했다. 데모할 때는 서로 웬수 같았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식당에서 다시 아저씨와 아들뻘 손님들로 만날 수 있었다.

일정한 수준이나마 물정을 균형되게 분석하거나 자각하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을 뜰 때까지 장손은 어지간한 보수였다. 베트남전우회와 고엽제전후회 회원이자 국가유공자이니 그럴만한 일이기도 하다.

아득한 시절 할아버지가 친일파 이늑우를 처단하고 삼촌이 옥사하는 등 조상들이 나라 위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세태는 참으로 씁쓸한 것이었다. 하기야 연좌제니 뭐니 제도까지 만들어 그런 세태를 부추긴 주인공은 오히려 국가였다. 친일파가 진실이 되어버린 역사가 무엇을 밝혀주고 무엇을 기릴 것인가. 독립운동을 하면 삼대가 망한다고 하던가. 이 집안도 그런 꼴이 된 것이다. 가마 타고 다니면서 주변의 존경 속에서 넉넉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던 할아버지 당시의 집안에 견주어 이 집안은 그야말로 쪽박 차게 된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할 때 장손의 까치담배는 짙은 연기를 내뿜곤 했다.

▶⑩편으로 이어짐

이노형 고래문화재단 상임이사 / 전 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