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노모의 49재를 다녀와서
친구 노모의 49재를 다녀와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11.10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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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나이 많은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망설이듯 말문을 열었다. “강 과장도 잘 알다시피 어릴 때 어머니와 단둘이 혈혈단신이었는데, 다음 주 월요일은 얼마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마지막 재(齋)를 올리는 날이니 와 주셨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난 주저함 없이 “네”하며 흔쾌히 승낙했고, 친구는 그제서야 안도하는 듯 음성이 밝아졌다.

친구와는 십오륙 년 전부터인가 글공부를 시작하면서 만남의 연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 특히 오륙 년 전에는 매주 토요일마다 동리목월창작대학을 2년 넘게 승용차를 같이 타고 경주를 오가며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며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지나고 보니 엄청난 재력가에다가 상당히 검소한 분이었다. 처음에는 ‘회장님’하며 깍듯이 존칭을 쓰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자문님’, ‘형님’ 하며 편하게 대하게 되었다. 더구나 친구는 SNS의 닉네임이 `친구`인지라 그 이미지 때문인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평소 시내에 볼일이 있으면 친구의 빌딩 주차장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날도 평소처럼 차를 세워놓고 빌딩 내 사무실을 찾았다. 거의 혼자 지키다시피 하던 사무실에 그날은 제법 건강한 할머니 한 분이 소파에 앉아 계셨다. 친구가 “어무이! 내 친굼더” 하자 노모는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보시더니 “그래요?” 하시면서 내 손을 꼭 잡아주셨다.

‘친구는 무슨 친구. 나보다 13살이나 많은 연장자인데….’ 그래도 노모에게 나를 친구라고 인사시켜서 어리둥절하고 기분이 묘했고, 이날따라 친구가 평소보다 더 존경스러워 보였다. ‘백세에 가까운 노모에게 나를 친구라고 소개하고 인정한 이상 누가 뭐래도 친구가 맞아.’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바로 내가 ‘친구’라고 우기고 싶은 강한 이유 중의 하나다. 한두 살로 형, 아우를 가리는 게 작금의 현실인데 친구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던 것이다.

노모는 그동안 겪으신 고생에 비하면 마음도 얼굴도 둥근 달처럼 환하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립운동가에다 화약폭파 기술자였던 남편은 유복자식 한 명만 달랑 남긴 채 먼 길을 떠나셨다고 했다. 그 유복자가 바로 내 친구다. 그의 수필집 ‘연어’를 보면 스물도 채 안 된 어머니의 그 처절했던 삶을 낱낱이 읽을 수가 있다.

친구의 노모를 마지막 떠나보내는 ‘사십구재’(四十九日齋) 그날이 왔다. 하필 그날은 내가 1년 동안 준비해온 시험 중 마지막 모의고사를 보는 날이었다. 원장의 허락을 받고 1시간 정도 늦게 출발했다. 49재 장소는 내 고향산천에 있는 신라의 천년고찰 석남사였다. 도착하니 스님 몇 분과 친구의 부인 등 낯선 대여섯 분이 참석한 가운데 의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친구 노모의 영전에 절을 올렸다. 스님의 염불은 극락왕생을 빈다는 법문으로만 들릴 뿐 와 닿는 게 별로 없었다. 아들이 어머니께 마지막 참회의 글을 올린다는 스님의 멘트에 귀가 쫑긋해졌다. 고인이 되신 친구의 모친은 향년 96세. 아들 역시 팔순에 가까운 나이다. 친구는 꾸부정한 모습과 허스키한 목소리로 ‘어머님 전 상서’를 읽어 내려갔다.

그는 “몇 년 전 이곳 석남사 대웅전 추녀를 보며 어머니와 함께 나누었던 얘기가 생각난다”며 울먹였다. “저를 아는 분들이 저를 독자(獨子)라서 많이 외롭겠다고 하셨지만, 외롭거나 힘든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안 계신 지금은 삭풍이 휘몰아치는 벌판에 내몰린 것같이 외로움이 너무나 절절해서 밤마다 속울음으로 밤을 지샙니다”라고도 했다.

단둘이 있을 때 친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저를 낳아 이렇게 잘 길러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라는 말에 어머니가 너무너무 좋아하셨지. 조금만 더 사셨더라면, 그 말을 수도 없이 했을 텐데”라며 한없이 서러워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오늘따라 자꾸만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강걸수 수필가, 전 울산북구 효문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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