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리대숲, 안타까운 사연 한 가지
십리대숲, 안타까운 사연 한 가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11.08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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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동 지난 11월 중순이다. 이른 아침 태화강국가정원의 황국은 머리에 서리를 이고 산책하는 행인을 맞이한다. 오산다리 부들밭, 샛강 요정은 물안개를 피워 쇠물닭을 포옹하고, 키 큰 왜가리는 수문장이 되어 지나치는 가마우지의 부산한 날갯짓을 꾸짖는다. 고개 들어 보면 하얀 갈대꽃이 말미잘 촉수같이 쉼 없이 손짓한다.

말채찍처럼 길게 누운 샛강에는 쇠오리, 쇠물닭, 논병아리 등 몸집 작은 물새들이 헤엄칠 때마다 동그란 파문의 꽃을 피운다. 새벽하늘에는 먹다가 남겨둔 피자 판처럼 생긴 조각달이 떼까마귀의 군무를 비춰준다.

입동이 지났다. 올해도 보름달 같던 세월이 마치 세 살배기가 오물거리는 입으로 뜯어먹은 빵조각이 되어 하루가 다르게 줄어든다. 떨어지는 잎사귀는 뿌리로 돌아간다는 낙엽귀근(落葉歸根)을 되뇐다. 이 계절 팜파스그라스를 닮은 센 머리카락을 귓바퀴 뒤로 쓸어 넘기면서 강변을 걷는다. 지나치는 낯익은 사람마다 밤낮이 다르고, 오전과 오후가 다른 사람 감정의 세월 속에 모두가 하얀 누에고치를 머리에 이고 있다. 동지섣달 칠흑색으로 머리칼을 염색해도 며칠 지나면 하얗게 돋는 것을 낸들 어찌하겠는가. 이 모두가 이른 아침 태화강국가정원의 길거리 풍경이다.

2020년 11월 4일, 일곱 시경, 태화강국가정원 오산못 주위 대숲에서 기계톱의 단말마 소리가 들렸다. 배기가스 냄새와 함께였다. 그 장소에서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소리이기에 궁금해서 가까이 다가갔다. 태화강국가정원에서 나는 기계톱 엔진 소리는 나무 자르는 작업 외에는 할 수 없기에 그랬다. 그 지역은 필자의 일일 조류조사 마지막 이동코스다. 그냥 지나가는 길에 궁금하기도 하여 작업 중인 대숲 속을 한참 들여다봤다. 여러 대의 기계톱 엔진소리가 높아질 때마다 꺾이고 쓰러진 대나무가 맥없이 잘려나갔다. 여물지 못한 대나무는 겨우 육 개월 여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섬뜩한 기계톱날에 잘려나갔다. 그들은 짧은 생의 터에서 질질 끌려나와 내팽개쳐졌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대나무로 자랐지만 구구구 울음 우는 멧비둘기 새끼도 안아 보지 못하고 이승과 작별합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대숲에 머물던 멧비둘기, 직박구리가 황급히 근처의 노란 국화밭 쪽으로 날아갔다.

2020년 11월 5일, 일곱 시경, 태화강국가정원 안내센터 주변 대숲에서 어제처럼 기계톱 엔진소리를 듣고 작업현장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운동 나온 지인이 현장을 보고 하소연하듯 볼멘소리를 했다. 난 맞장구는 안 쳤다. 그저 작은 미소를 몇 번 지었을 뿐이다. 나까지 입을 보탰다가는 종일 잡혀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인의 일행이 거들었다. “간벌한다고 돈 들이고, 처리한다고 돈 들이고 잘하는 O이야.” 지인이 말을 받았다. “하기야 돈은 돌고 돈다고 해서 돈이라 하더라마는….” 어쩐지 말투는 개운하지가 못했다.

2020년 11월 6일, 일곱 시경, 청초한 대나무는 온몸에 상처를 입고 트럭에 실려 옮겨지더니 한 쪽에 차곡차곡 쌓여 갔다.

그날, 지역 일간지를 펼쳤다. 사회면을 살폈다. “울산시는 지난 9월 내습한 태풍 ‘마이삭’과 ‘하이선’ 때 피해를 본 태화강 국가정원 내 십리대숲을 복구하는 사업을 4일부터 다음달 18일까지 45일간 진행한다고 밝혔다. 시는 내년에 건강한 죽순이 성장하도록 돕고자 뿌리 생장 휴면기인 이달부터 복구 작업을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사업비는 2억4천만 원이 투입된다.”(울산제일일보,2020.11.05.) 신문을 읽은 뒤에야 비로소 이른 아침 운동 나온 지인의 볼멘소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2020년 11월 7일, 일곱 시 20분경, 대숲에는 포클레인까지 등장했고, 잘린 대나무의 쌓임은 더해 갔다. 청순미(淸純美), 지조목(志操木)의 상징인 대나무가 어쩌다 상처투성이 저 지경이 되었을까? 그 모습이 안쓰러워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발걸음을 재촉하여 모퉁이를 돌아 나왔다. 우연인지, 인연인지 마침 지나가는 행인의 라디오를 통해 등려군(鄧麗筠, 덩리쥔. 1953~1995, 대만 출신 가수)의 노래 ‘첨밀밀(甛蜜蜜=‘꿀처럼 달콤하다’는 뜻)’이 흘러나왔다. 그 노래는 버려진 대나무가 처지를 비관하여 나직이 부르는 이승의 마지막 신음으로 들렸다. 번안가사를 떠올렸다.

“달콤해, 달콤한 너의 미소는, 마치 봄바람에 피어난 꽃 같구나, 봄바람에 피어난./ 어디선가, 어디선가 본 듯한 너, 웃는 모습 이리 낯익지만, 금방 생각이 안 나네./ 아~맞아, 바로 꿈속에서 봤구나. 꿈속, 바로 꿈속에서 널 봤어, 웃는 게 얼마나 달콤했다고……./ 바로 당신, 꿈에 본 건 바로 당신이었지./ 어디선가 본 듯한 너, 웃는 모습 이리 낯익지만, 금방 생각이 안 나네./ 아~맞아, 바로 꿈속에서 봤구나”(등려군의 첨밀밀)

산전(山戰), 수전(水戰), 공중전(空中戰)을 두루 겪은 다양한 인생여정에서 이해 못할 것은 아니지만,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나만의 느낌 탓도, 계절 탓도, 연식 탓도 아닌 것 같다. 다만, 대나무의 서식 생태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김성수 철새홍보관 관장·조류생태학 박사/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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