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辱) 좀 지워주오
욕(辱) 좀 지워주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11.05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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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이, XXX아 당장 X져라” 교각 상판 아래쪽에 휘갈겨 쓴 글씨가 있다. 다리 위로 교통량이 많은 지방도 구간이고, 아래쪽은 시민 활용도가 높은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나는 거기를 지날 적마다 애먼 욕을 듣는 기분이다. ‘디’ ‘져’ ‘라’의 ‘ㅣ’ 모음 끝에 붉은 페인트 방울이 맺혀, 선혈이 낭자한 장면을 연상하게 된다. 해질녘이거나 어슴새벽 비안개 속에서 호랑지빠귀의 울음이 들릴 때면 공포감마저 든다.

수변 환경은 사시장천 다채롭게 변주한다. 춘수기 일주일은 가로수 벚나무들의 성찬기간이다. 가로등이 일제히 불을 켜듯 꽃망울이 터지면 크고 작은 화초들이 피고지기 시작한다. 물억새, 개망초, 부들이도 청년의 기세로 줄기를 살찌우고, 금계국, 달맞이꽃의 바통터치가 이어진다. 그 황금색과 다리 난간의 사피니아 코럴색은, 유채화의 강렬함과 수채화의 유연함을 믹스한 풍경화를 연출한다. 인(人)·내(川)·도(道)가 조화로운 곳에 이질적인 것은, 호러 영화 제목 같은 그 낙서뿐이다.

오늘도 걷기를 하다 다리 아래에서 쉴 때 옆에서 사람들이 불만을 토로했다. “누가 저 낙서 좀 안 지워주나” “저리 높은 데다 욕을 싸질러 논는다꼬 소용이 있으까” 공공장소 무단 격노표출은 자기중심적 방출이기에 나도 맞장구를 치는데, 순간 오래전에 다녀온 봉래산의 바위가 떠올랐다.

옥류동 계곡으로 들어설 때 나는 눈시울을 붉혔다. 억겁의 풍화가 만든 기암괴석, 천길 단애로 내리꽂히는 폭포수, 비취빛 담소에 비친 데칼코마니 절경은 차라리 슬픔이었다. 잠시 뒤 탄성이 비명이 되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반반한 바위 곳곳마다 김씨일가의 주체사상이 검붉은 강건체로 새겨져 있었다.

각수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생명을 담보 잡혔을 노동자들은 벼랑에 매달린 채 끌과 망치를 들고 혹한(폭염)에 맞섰을 터. 사망자도 속출했을 게다. 각석이 이데올로기로 치환되니 천하일색 만물상이 스릴러 장면 같았다. 비경의 비극이었다. 물론 순기능적 낙서도 있다. 이집트 피라미드에 새겨진 왕족의 흔적, 징용간 아들이 땅굴 벽에 남긴 ‘엄마’, 선사인의 그림 등은 역사를 해석하는 키워드로서 가치가 있다. 그렇다면 저 낙서는 무엇인가?

그는 야간을 틈타 사다리와 페인트통을 들고 이곳에 왔을 게다. 가슴엔 한을 품고, 눈엔 화를 담고, 분기탱천하여 붓에 힘을 주었으리. ‘믿던 도끼에 발등이 찍혔을까, 가족이 억울한 죽임을 당한 걸까? 기실 실패와 좌절을 피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이럴 때 극도로 치솟는 스트레스를 풀어줘야 살 수 있다. 그걸 푸는 방법 중 가장 쉬운 것이 낙서다. 역설의 에너지를 노린 일탈행위로서 작은 위안의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천환경 오염, 관광객, 시민의 심기를 불안케 하는 환칠을 이해하긴 어렵다.

익명의 낙서자여, 1여 년이 지났으니, 이제 저 욕 좀 지워주시오. 인생사 사필귀정 원칙을 믿으시고.

윤지영 울산과학대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강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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