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통의 이상한 사연과 가난한 생활
전쟁통의 이상한 사연과 가난한 생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11.03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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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어놓은 시간들을 찾아서 ⑧-

목숨이 직접적으로 유린되지는 않더라도 헐벗고 굶주릴 수밖에 없는 사연도 전쟁통의 일반적인 현상일 것이다. 가난했던 새터마을 장손의 집이라고 하여 나아질 까닭이 있겠는가. 어느 날 장손의 집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십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말이다. 섣달그믐을 며칠 앞둔지라 날씨가 제법 매서울 즈음이었다. 이른 아침 일어나 마루도 없는 집 방문을 열고 짚신을 실으려는데 낌새가 이상하더란다. 정지 쪽에서 그랬다. 전쟁통이라 지나치게 긴장해서일까. 얼른 돌아본 눈길에 평소 안 보이던 희뿌연 무엇이 보인다. 문도 안 달린 정지 입구에 바싹 붙어 세워져있는 것이었다. 저게 뭐지. 얼룩이 여기저기 묻어있는 낯선 자루가 불룩해 보였다. 까막눈이 보기에도 퍽이나 낯선 글자들이 자루 겉에 새겨져 있었다. 모르긴 해도 구호물자를 담았을 자루일 수 있었다.

멀리 장생포 주변 바닷가 일대에는 미군 부대가 물밀듯이 들어와 있었다. 가까이로 대일마을에 미군 항만군수기지사령부가 들어섰으니 이 일대에는 물자가 넘쳐나고 있었다. 물자만이 아니었다. 낯선 여성들도 갑자기 많아졌다. 미군부대 주변을 따라 늘어서야 했던 여성들이었다. 전쟁통 최대의 피해자가 여성들이 아니던가. 막막한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었을 풍경이리라. 피난민들의 천막들로도 북적댄다는 소식을 포함한 이런 낯선 소문들이 멀리 떨어진 울산 서북쪽의 새터마을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어머니는 짚새끼로 야무지게 묶어놓은 자루 입구를 풀어헤쳤다. 안쪽에는 묶어놓은 자루 하나가 더 들어있더란다. 그 속에 묵직하니 소고기가 들어있었다. 큼지막한 뒷다리였다. 세끼는커녕 아침에도 나물죽으로 때워야할 정도로 굶기가 일상이 된 전쟁통에 뜬금없는 횡재라니. 들뜨기보다 어머니는 우선 가슴부터 쓸어내려야 했다. 솥뚜껑 보고도 놀라던 시절이었다. 골목으로 나가 이쪽저쪽을 두리번거렸지만 마을은 조용하기만 했다. 겨울이라선가 멀리 삼강봉의 백운산으로 이어지는 마을 뒷산 오봉산 쪽도 차분했다. 누가 가져다 놓았을까. 왜.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를 노릇이었다. 어머니는 물론이거니와 장손도 소고기에 얽힌 사연을 끝내 모른 채로 관련 구술만 남겨두고 이제는 다 세상을 떠났다.

자식대의 집안은 정말 어려웠다. 그 시절 맏이가 조상과 선산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풍속이더라도 아버지는 애초부터 까막눈의 농투성이가 되어야 했단다. 글자도 물정도 몰랐다. 그런 아버지를 얘기할 때 장손은 뭉뚱그려 그의 무능을 단언하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재력이 있었을 동안에는 그나마 부잣집의 도련님 신분일 것이었다. 이제 가난마저 덮쳐왔으니 오죽하겠는가.

자식에게 불행을 물려주고 싶어 할 부모가 세상천지 어디에 있으랴. 스스로의 불행의 배경을 넓고 깊게 바라보는 눈을 장손은 가지질 못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삼촌이 그에게는 가난의 가장 뚜렷한 까닭들일 따름이었다. 장손은 할아버지에게서 대의보다는 가족의 안녕을 팽개친 그의 모습을 보고자 하고 그런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두어야했던 애비의 불행보다는 그의 무능을 먼저 보고자 했다.

어린 시절 손자는 먹고살기 어려워 부모를 따라 강원도 삼척으로 이사 가야 했다. 삼척에 사는 한 삼촌이 그나마 여건이 좋았는지 그에 기대보려고 이사 갔단다. 초등학교를 삼척에서 졸업하고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단다. 그곳의 삶도 바닥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돌아온 고향에서 몇 해 지나지 않아 무능한 아버지가 그만 세상을 떴다. 게다가 초가삼간마저 가재도구랑 화재 속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장손의 청소년기는 학교 대신 품앗이와 더러는 머슴살이로 보내야 했다. 홀어머니며 두 동생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었다.

겨우 두어 칸짜리 집을 마련해 살다가 입대했고 찢어지게 살아온 가정환경은 장손으로 하여금 군대생활까지 생계에 대한 고민 쪽으로 몰아갔다. 피값이라 할 돈이라도 모으고자 하여 생사가 오가는 베트남전쟁 파병을 자원하기로 한 것이다. 베트남전에서는 구사일생의 고비를 넘긴 채 겨우 살아 돌아왔다. 제대하고서 목숨값으로 마련한 몇 마지기 논밭 농사를 열심히 지었다. 농지가 몇 마지기 되지도 않았거니와 그때나 지금이나 농사로 모을 돈도 없는 이치인 탓에 어머니와 두 동생이랑 그저 먹고 살만한 시골생활 정도는 되었다.

이윽고 산업화가 진척되어가는 가운데 특별한 기술이 없던 그도 도시로 나가 직장인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너도나도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가지 않던가. 누구도 거역할 수 없을 도시이농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던 시절이었다. 세계 굴지의 비철금속 제련소인 고려아연도 70년대 후반 온산공단에 설립되었다. 거기 바로 입사할 수 있었다. 그곳은 퇴직할 때까지 장손의 평생직장이 되었다. 스무 여섯 해 동안 근무한 부서는 아연 등의 철광석을 녹여 쇠붙이를 뽑아내는 용광로 관리였다. 제련 작업과의 인연은 어쩌면 쇠를 다루던 쇠부리사업가 할아버지의 유전자 탓인지도 모를 일이다. ▶⑨편으로 이어짐

이노형 고래문화재단 상임이사/전 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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