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어놓은 시간들을 찾아서 ⑦ - 옥사하거나 북행한 삼촌들
-묻어놓은 시간들을 찾아서 ⑦ - 옥사하거나 북행한 삼촌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10.2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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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아들들 즉 장손의 삼촌들의 삶도 평범할 리가 없었다. 다들 가난했던 모양으로 고향에 뼈를 묻은 형제는 맏아들을 포함한 두 아들뿐이라는 사실도 그를 방증한다. 나머지는 나라 안팎으로 다 흩어져 살아야 했다. 정확하지는 않으나 할아버지의 일곱 아들 중 아래쪽 서열의 두어 삼촌들의 운명이 특히 꼬였단다. 불행은 가난 탓만이 아니었다.

한 삼촌은 고기비늘 장사를 했다고 한다. 조카는 그 뜻을 지금껏 모른다. 그것이 바다 건너를 나다니며 하는 해외사업이거나 무엇인가 좀 불길한 사업쯤이 아니었을까라고 막연히만 생각해 왔다. 그가 일본과 만주를 내왕한 것으로 알려져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촌은 옥사한 인물이었다. 왜놈에 잡혀 평양감옥에서 고문 끝에 옥사했다는 것이다. 그건 집안이 다 아는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고기비늘 장사는 삼촌 본인이 꾸며낸 사업일 수 있다. 왜 가족도 모르도록 애매한 말로써 가장했을까. 이것은 아무래도 어떤 비밀활동을 가장하기 위해 지어낸 유령사업일 가능이 짙다. 이것이랑 왜놈 통치기관이 자행한 고문과 옥사 사실을 묶어 생각해보면 옥사한 삼촌은 먼저는 비합법 또는 지하 항일투쟁가쯤으로 이해되는 인물인 것이다. 아버지의 유전자일지도 모른다. 대의의 실천 풍모에서 부전자전일 수 있는 것이다.

일제는 고향 울산에다 옥사 소식만은 알려주었다. 그렇지만 아무도 시신을 찾으러 가지 못했다. 민감한 정치적 사건이기에 일제의 눈초리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나랏일로 하여 집안이 쑥대밭이 되어야 했던 상처는 이미 그의 아버지 때에 맛본 것이 아니던가. 핏줄의 시신조차 찾아오지 못한 야만이 독립운동사에서 어디 한두 번 만이던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남은 가족과 일가만이라도 감시의 눈초리에서 벗어나야 할 일이다. 삼촌의 어머니 즉 장손의 할머니는 그 일로 몸져누운 뒤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옥사한 삼촌의 종아우 그러니까 장손의 당숙은 어린 시절 고향에 들르곤 하던 사촌형을 기억한다. 일곱 형제들 중의 막내인 그가 가장 똑똑했고 분명하지는 않으나 일본에서 공부도 한 것 같다고 했다. 고기비늘 장사를 하는 그가 마을에 들를 때면 종아우에게 흔히 선물을 쥐어주었다. 수첩이나 한문책 등이 그것으로 열심히 공부할 것을 당부하곤 했다. 고기비늘 장사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우도 집안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대강만 전해 들었을 뿐 자세하게는 알지는 못했다.

다만 그것이 무슨 독립운동과 관련되는 일이라는 것쯤은 낌새 정도로 알고 있었다. 집안사람들이 쉬쉬하는 가운데 알고 있는 소문 내용도 대개 그런 수준이었단다. 하기야 자세하게 안들 그게 무슨 득이 될까. 미증유의 혹독한 시절에 산 사람들이라도 살아야 할 이치가 아니던가.

이런 정보를 전해준 장손의 당숙은 자신보다 십여 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 재력가였던 종할아버지를 닮았는지 당숙의 아들 즉 장손보다 몇 살 아래의 육촌 아우도 재력을 이루었다. 기업인의 최고 영광인 정부의 금탑산업훈장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국가경제에 크게 기여한 기업인에게 주는 최고의 훈장이다. 그는 앞으로 종조부의 행적을 복원하는 일에도 앞장서리라 다짐하고 있다. 콩 심은 데에는 끝내 콩이 나는 모양이다.

장손의 또 다른 삼촌의 행방도 평범하지는 않다. 다섯째 삼촌인 그는 만주에 살다가 해방 뒤에 고향으로 오질 않고서 북한으로 갔다고 한다. 만주에도 개설되어 있던 아버지의 점사업을 도울 겸 만주를 수시로 다녔던 삼촌이었다. 그의 북행 소식은 해방 직후 고향으로 귀향한 왕고모 즉 할아버지의 여동생을 통해 알려졌다. 당시 만주에는 할아버지가 세상을 뜬 30년대 중반 이후로도 함께 모여 살 정도로 피붙이들이 한 마을에 살고 있었던 모양이다. 할아버지의 쇠부리점이 만주에도 있었으니 왕고모나 삼촌도 그런 할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간 셈이었다. 이 왕고모는 새터마을이랑 서로 같은 행정리에 드는 이웃 음지마을로 귀향해 살았다. 아무튼 할머니를 통해 알게 된 것은 다섯째 삼촌의 행방에 대한 정보였다. 그 삼촌도 막내삼촌처럼 매우 똑똑했는데 물정에 밝아서 국내외를 오가며 아버지 사업을 돕곤 하다가 해방 직후 북한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삼촌이 왜 북한으로 갔는지 등의 관련 사실에 대해서는 왕고모도 더 이상 해줄 얘기가 없었다.

전쟁 때에 인민군이 울산 일대에는 못 들어왔다. 하지만 울산에서도 치열한 현장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신불산을 비롯해서 굽이치는 낙동정맥 거봉들을 따라 전개된 슬픈 역사가 그것이다. 인민유격대 제3병단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남아서 저항했던 곳이 신불산, 가지산, 그리고 새터마을에서 가까운 백운산 연봉 일대였던 것이다.

전투 현장에서 발생하는 참상이야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 참상이 바깥 일상의 생활 현장으로도 확대된다면 말이 달라질 수 있다. 거대한 규모의 학살인 동시에 무죄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학살이라면 더욱 말문을 닫게 하는 참담함이다. 아직껏 진행형인 과거사 진상 규명의 중요한 내용을 이루는 이른바 국민보도연맹 사건과 같은 것은 전형적 사건이 아니던가. 울산지역도 낙동정맥을 배경으로 하는 동족상잔의 비극적 사태뿐만 아니라 천인공노할 그런 학살이 예외 없이 일어났던 곳이다. ▶⑧편으로 이어짐

이노형 고래문화재단 상임이사 전 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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