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어놓은 시간들을 찾아서 ⑥ - 생활현장 속 우리소리의 명인
-묻어놓은 시간들을 찾아서 ⑥ - 생활현장 속 우리소리의 명인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10.20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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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할아버지의 이늑우 처단 사건은 도대체 언제쯤 일어난 사건일까. 이 사건의 시기를 어림잡아볼 수는 있을 듯하다. 우선 쇠부리광산이 왜놈 광산업자 나카무라에게 강탈된 1906년 이후에 일어난 일일 수 있다. 그래서 1906년 이후 할아버지 사망 시점인 1936년까지 20년 정도의 시간이 일단 주목된다. 그런데 향촌에서 체통의 상징인 가마와 같은 귀물에 접근하려면 어느 정도 연로해야 하고, 상대를 다리 아래로 던져 처단할 정도의 완력을 지닌 나이여야 하고, 쇠부리 거래관계도 갈등이 축적될 정도의 나이는 되어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1910년대는 젊은 나이이고 1930년대는 노년기인 탓에 1920년대의 어느 시점으로 헤아려진다. 꼭 20년대는 아닐 수 있다. 3·1운동에 참여하듯 사회적 각성과 활동이 활발해질 무렵부터 20년대 어느 시점 사이쯤일 수 있다.

어쨌든 할아버지의 이러한 사연이 대강이나마 사람들의 입과 귀를 빌려 손자대에까지 전해온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고 하겠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그의 삶이 보편적 호소력을 얻을 대의적 삶에 이바지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거나 친일파를 가차없이 응징한 사건은 대의적 삶의 전형일 것이다. 사람들이 까닭 없이 가마 탄 할아버지 앞 길바닥에 엎드렸으랴. 그의 의로운 삶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일 수밖에 없다. 거기에 핏줄인 손자의 과장된 표현이 섞여들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할아버지의 삶을 존경하는 사람들의 진심만은 분명한 것일 수 있다. 그런 존경심을 표현하는 행위가 꼭 그런 가마 풍경이어야만 할 필요는 없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존경스런 삶은 대가를 요구한 삶이기도 했다. 그에게는 일곱 아들과 딸 하나가 있었다. 재력에다 아들까지 많으니 당시로는 무척이나 다복한 집안이었지만 할아버지의 거사 이후부터 집안은 급격히 몰락해갔다.

잘 나가는 친일파를 처단한 것이라면 할아버지는 단순 살인범일 수 없다. 보안법이나 치안유지법에서 그는 살인범인 동시에 정치범이고 사상범이다. 정치범 수사에 있어서 유일한 수사기법이라 해도 좋을 혹독한 고문 과정이 따를 것이고 거기서 살아나더라도 최고형인 사형 선고가 예정될 죄인이다. 그러므로 할아버지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고 그런 과정에서 집안이 그만 무너졌을 수 있다. 포괄적으로 전하는 장손의 구술에 의하면 사건 직후 할아버지는 살인자가 되어 허둥지둥 피신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재산이고 뭐고 다 날아갔단다. 그런 몸부림에는 구명 과정도 있었으리라 짐작해볼 수도 있다. 할아버지가 끝내 투옥되었는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관련 사실을 손자도 말하지 못했다. 그도 할아버지의 이력에 대한 구체적 정보까지를 가지고 있진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그런 내력이 일반적으로는 넉넉히 짐작될 상황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할아버지를 단순한 살인자로 낙인찍어 수군거리는 세태는 더욱 야속한 것이었다. 후손의 그런 하소연이 근거 없는 과장이나 열등감일 수는 없다. 진실에 눈먼 세태며 목구멍이 포도청인 세태가 어디 어제오늘의 시류이던가. 그런 손가락질이 뒤에 말할 삼촌들의 운명과도 연계되어 증폭되면서 자손들에까지 따라다니기도 한 모양이다.

장손에게는 장기가 있었다. 민요든 가요든 가리질 않고 그는 소리를 정말 잘했다. 응어리를 삭혀주거나 풀어주고 공감 속에 하나로 묶어주거나 새로운 힘으로 장애물을 넘게도 하는 것이 노래의 힘일 것이다. 소주자리에서 노래를 부추길 때면 장손은 곧잘 응해 어울렸다. ‘얼마나 멀고먼지 그리운 서울은…. 아~~ 바다가 육지라면 눈물은 없었을 것을.’ 곧잘 부르던 이런 가요는 베트남전의 낯선 밀림 속에서 가족과 고향을 떠올리면서도 불렀을 노래일 수 있다. 그의 특유한 목소리가 빛을 발하는 것은 우리소리를 부를 때다.

‘낭창낭창 베리 끝에 무정하다 울오라바/ 난도야 죽어 저승 가선 낭군부터 찾을란다// 물꼬야처정청 헐어놓고 주인양반아 어딜 가노/ 장터 안에 첩을 두고 첩에야 방에 놀러가네// 해 다 졌네 해 다 졌네 양산 땅에 해 다 졌네/ 방실방실 웃는 아가 몬 다 보고 해 다 졌네.’ 떡대 같은 사나이의 목소리는 참 구성지고도 간드러졌다. 메나리조 선율의 이런 모심기소리를 부를 참이면 기가 막히곤 했다. 애환 깃든 사설이며 길게 빼는 선율이 그의 구슬픈 목소리랑 만나 울림은 깊어지고 넓어져갔다. 우리소리의 일반적 특징이듯 슬픔을 너머 밝은 분위기로 넘어갈 때면 그의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제 역할을 하여 익살과 해학이듯 금방 밝은 분위기를 빚어내곤 했다.

언젠가 경남 양산지역 지인의 상갓집에서 여느 풍속과 달리 무당을 불러들였다. 무당이 망자의 혼을 달래고 분위기도 돋울 겸 이런저런 노래와 타령을 하더란다. 가만히 지켜보던 장손이 한 소리를 하겠다고 나섰는데 회심곡을 불렀다. 이 양반의 노래가 얼마나 구성졌는지 눈물을 흘리거나 박수를 치는 등으로 분위기가 난리가 아니었다. 상주는 친구인 장손을 붙들고 거듭 고마워했고 그 날의 무당도 신분을 물어보면서 동업을 요청할 정도로 감동하더라는 것이다.

소리로 혼을 빼놓는 장손의 이런 장기의 배경이 어찌 개성적인 그의 목소리만이겠는가. 그런 울림을 얻는 데에는 조상 탓에 몰락해버린 불행한 환경을 감내하며 세파를 헤쳐나와야 했을 그의 인생사도 한 몫 했을 수 있다. ▶⑦편으로 이어짐

이노형 고래문화재단 상임이사 / 전 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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