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음하는 대곡천
신음하는 대곡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10.18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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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급 암각화바위를 2.4km 사이에 두 덩어리나 끌어안고 있는 울주군 두동면 대곡천이 인간들의 잘못으로 신음하고 있다면 지나친 말일까. 국보 285호 반구대 암각화(巖刻畵) 바위의 몸살이 지나친 극성 때문이라면 국보 417호 천전리 각석(刻石) 주변 계곡의 병치레는 습관적 무관심 때문이 아닐까.

시월 셋째 주말 오후, 이 두 명소를 모두 품은 대곡천을 평소에도 자주 찾는다는 지인을 따라 천전리 각석을 오랜만에 다시 찾았다. 큰물이 날 때마다 잠기는 시멘트다리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며칠 전 이 다리의 앞날에 대해 들은 얘기를 전하며 의견을 물었다. “이 다리를 걷어내고 각석에서 더 가까운 지점에 새 다리를 놓는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글쎄요. 지금 이대로도 괜찮은데 왜 굳이 새로 만들겠다는 건지. 각석에서 가까워지면 더 안 좋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러던 참에 시야에 잡히는 것이 있어서 유심히 살폈다. 대곡천 물길이 스치고 지나갔을 자갈더미와 바위 언저리마다 백화현상(白化現象)을 떠올리는 흔적이 곳곳에 흩어져 있는 게 아닌가. 잠시 헛것을 보았나 싶어 눈을 부비고 다시 살폈다. 시멘트다리 위쪽 계곡에도 아래쪽 계곡에도 온통 새하얀 앙금이 뒤덮고 있었다. 이번에는 시선을 시멘트다리 아래 물속으로 돌렸다. 갈색 이끼류인 듯한 썩은 수생식물들이 여기저기 패잔병처럼 떠 있는 모습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말해주는 것 같았다.

때마침 시멘트다리를 지나던 산책객 한 분을 만나 혹시 그 이유를 아는지 물었다. 이곳을 수시로 드나든다는 그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귀를 의심케 했다. “아, 이 허옇게 염색된 돌들 말이죠? 10호 태풍 하이선이 지나간 뒤부터 생긴 현상일 겁니다. 아무래도 더 상류 쪽에 있는 시설 같은 곳에서 흘려보낸 유독물질 때문이라는 의심도 듭니다만….” “그럼, 관리당국에 신고라도…?” “예, 아는 양반이 며칠 전 관리부서에 신고한 걸로 아는데 아직 조치가 없는 모양이지요. 허연 그대로인 걸 보면….”

내친김에 발길을 공룡발자국 화석들이 아주 가깝게 내려다보이는 천전리 각석 앞쪽으로 돌렸다. 그곳의 백화현상은 더 넓고 길었고, 물가 바위 언저리에 하얗게 말라버린 띠는 태풍 직후의 모습 그대로인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태풍 때 수 미터나 떠내려갔다는 천전리 각석 글·그림 설명판 두 개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제자리로 돌아온 일이다. 문득 이런 생각도 다 들었다. 여기가 만약 문화재청 인사도 오고 국회의원도 와서 사진 찍고 가는 반구대 암각화 주변이라면 사정이 달라도 한참 달랐을 거라는…. 세인의 관심이 국보 285호 한군데로 쏠린 사이 천덕꾸러기처럼 잊히고 만 것으로 보이는 천전리 각석. ‘울 밑에 선 봉선화’가 이런 모양이었을까?

앞서 찾았던 암각화박물관 얘기도 잠시 하고 넘어가야겠다. 초대 관장 붙들고 인터뷰한 지가 수삼년도 더 됐으니 참으로 오랜만의 방문이었다. 그 사이 내부구조가 몰라보게 달라진 건 너무도 당연한 일. 다만 2층이 11월 전시회를 앞두고 내부단장 공사가 한창인 탓에 분위기가 을씨년스러운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1층만 둘러보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1층 전시실 어느 모퉁이에서 한동안 걸음을 멈춘 것은 몇 마디 글귀 때문이었다. 찬찬히 살폈더니 ‘청동기시대 암각화와 유물’에 대한 설명문 첫머리가 이상했다. ‘청동기시대에 발견된 암각화’란 표현이 그것.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암각화’라면 몰라도 이건 아닌데 싶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홍보물(‘울산 암각화박물관’ 중 ‘청동기시대의 암각화’)의 설명은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발견되는 암각화’라고 바르게 적혀 있었다. 순간, 대곡천이 이래저래 신음 중이라는 생각이 안 들 수 없었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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