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어놓은 시간들을 찾아서 ⑤ - 친일의 피붙이를 어느 다리 위로 유인해내다
-묻어놓은 시간들을 찾아서 ⑤ - 친일의 피붙이를 어느 다리 위로 유인해내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10.13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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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더라도 이늑우가 광산의 사장 신분은 아닌 듯하다. 살해당한 그는 이를테면 쇠부리광산과 연계된 인물들 중에서 광산 소유주인 사장이 아니라 왜놈 사장 밑에서 일하던 책임자급의 조선 사람일 수는 있다. 전문경영자나 간부 말이다. 아니면 그는 광산의 직원이 아니라 광산 가까이나 울산 일대에 무리지은 수많은 쇠부리터 점주들 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점주인 할아버지의 존재처럼 말이다.

말했듯이, 처단한 이유가 거래관계에서 야기된 사사로운 원인일 수는 있다. 즉 쇠부리광산에 고용된 조선인 책임자와 점주 각각으로 이루어지는 갑을관계에서 빚어진 갈등으로 하여 약자인 점주 할아버지가 강자인 전자를 죽인 사건일 수 있다.

하지만 살해 이유를 단순히 경제적, 개인적 이유만으로만 단정할 수도 없다. 친일파 처단을 역설하는 손자의 일관된 주장을 떠나서라도 그러하다. 즉 피살자가 족친의 이늑우라고 하는 특정한 존재인 데다 태극기 사건 등 할아버지의 대의적 활동들 전체에 비추어 본다면 사사로운 사건으로만 헤아릴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금전문제 등 거래관계에서 발생한 사사로운 배경도 배제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래서 이 사건의 성격에 대하여, 구술자의 주장처럼, 먼저는 친일파 처단 사건이더라도 그 다음으로는 사사로운 거래관계의 원한 사건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자세한 신분이야 무엇이든 간에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왜놈 사장이나 강점기 질서에 편승해서 갑을관계에 입각한 일방적인 거래 등을 강요한 친일 경제인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찬우는 일상적이 아닌 적극적인 친일파로 이해되어야 한다. 오죽하면 피살까지 당했으랴. 그마저도 핏줄의 손에 처단된 게 아니던가. 이익과 출세를 위해서 왜놈들의 앞잡이가 되는 대신에 그들의 힘을 빌려 자신의 사업장은 물론이거니와 민족구성원의 보편적 삶의 전반에 걸쳐 전방위적 횡포를 부렸을 정치적이고 반민족적인 친일파인 것이다. 핏줄의 손으로 처단될 정도로 잘 나가던 인물이라면 관련 증거가 부족할지라도 그는 적극적 친일파일 수밖에 없다. 장손의 할아버지는 오랜 동안 그와의 개인적 거래 과정에서 그런 실상을 직접 체험, 확인함으로써 처단을 결심했을 수 있다.

짤막하나마 사건 현장을 말하는 손자의 구술이 무척 인상적이고 압축적이다. 피해자의 마을이나 사무실이 구체적으로 어딘지는 모른단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밤중쯤 피해자를 찾아가 바깥으로 불러냈다는 것이다. 불러낸 장소는 높다란 다리 위였다. 1924년 울산 최초로 놓은 태화강의 삼호교일까. 사건 장소가 달천철장 가까이라면 해당 다리는 1927년에 놓은 병영교일지도 모른다. 울산 일대의 나머지 콘크리트 다리들은 모두 이것들보다 늦은 시기,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사후에 놓은 다리들이라서 할아버지 사건과는 무관한 다리들인 셈이다.

밤중인데도 만남에 순순히 응한 걸 보면 두 사람 사이에 지속된 거래관계가 오래된 것일 수 있다. 문중 핏줄인 탓에 상대가 방심했을지도 모른다. 해당 시기가 얼추 삼일운동을 전후한 엄중한 시기이거늘. 간땡이가 배 밖으로 나온 걸까.

다리 위로 불러내는 데 성공한 할아버지가 냅다 그의 멱살을 잡았단다. 주변에 인기척은 전혀 없었던 모양이다. 다리 위에 조명 같은 것도 없었다. 결심은 이미 단호했기에 할아버지 입에서 짧고 묵직한 고함소리가 뱉어졌다. ‘뱃때지 마이 불렀제. 넘에 눈에는 피눈물을 내고. 니겉이 추저분 놈, 살아 뭘 해.’ 번쩍 들린 이늑우가 다리 아래로 패대기쳐졌다.

강점기에 일어난 이런 사건의 정확한 시점을 알아볼 기록은 없다. 기록사가 아닌 구술사에 따라다니는 빈틈 탓일 수 있다. 더구나 전체사가 아닌 지역사가 아니던가. 일왕과 같은 침략의 우두머리를 향해 폭탄을 던진 것도 아니고 오적과 같은 친일의 거두를 찌른 전국적 사건도 아닌 것이다. 벼슬과 재력에서 승승장구해온 가문임에도 불구하고 전통의 거대 기득권 일체를 독립운동에 전격적으로 바친 채 갖은 고초와 희생을 감내한 같은 경주 이씨 일가인 이회영 가문 차원의 명성도 아니다.

즉 이명서 할아버지의 그런 의거가 묻혀버린 까닭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선 그런 방향의 독립운동 일반에서와 같이 은밀한 역사 탓이라 하겠다. 기록화가 불가능했던 독립운동이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지역사 수준의 운동사인 것도 그를 묻어놓게 한 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까닭은 정치적 파행에서 찾아져야 한다. 국가 차원에서 오랜 세월 동안 은폐와 왜곡, 소외를 강요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 가운데 가족과 일상의 생계에 매달리느라 고달프고 바쁜 일상에 매몰될 수밖에 없었던 후손들로서도 조상의 진실을 밝혀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겠다. ▷ ⑥편으로 이어짐

이노형 고래문화재단 상임이사/전 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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