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하이선’의 값비싼 교훈
태풍 ‘하이선’의 값비싼 교훈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9.13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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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제10호 태풍 ‘하이선’이 내리막길을 달리는 검은 염소처럼 울산을 찾았다. 울산을 통과한 7일 하루의 강수량은 118.4mm. 이날 태화강국가정원을 찾았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일 년 삼백육십오일 날마다 찾는 조류조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수위는 오산못 상부 인조석에까지 차올랐다. 오산다리, 느티다리는 오산못보다 수위가 낮은 탓에 이미 물속에 잠겼다. 느티다리 아래에 있던 부유식 개구리조형물은 느티다리 위에서 기타를 치고, 붉은귀거북은 물에 잠긴 잔디밭에서 엉거주춤 주위를 살피고 있다. 블루길 치어는 장화가 만든 구정물 속을 잽싸게 헤엄쳐든다. 무엇보다 쇠물닭이 보이지 않아 걱정이다.

9월 초에 부화한 듯한 쇠물닭 새끼 한 마리를 어미가 조심스레 데리고 오산못 부들밭에서 먹이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이날은 보이지 않는다. 다음날에야 물 빠진 오산못에서 찾을 수 있었다. 새끼는 태풍을 경험해서일까, 어미가 건네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면서도 두 날개로 덜덜 떤다. 태풍이 지나 맑게 갠 태화강 하늘에는 붉은부리갈매기 수십 마리가 강 상류를 향해 이리저리 무리지어 날아다닌다. 때론 흙탕물에 내리꽂히듯 내려앉았다가도 다시 날아오르기를 반복한다. 9호 마이삭 때도, 10호 하이선 때도 같은 행동을 보였다. 부유물에서 먹이를 찾기 때문이다.

흰뺨검둥오리는 샛강 가장자리를 찾아 옹기종기 모여 깃 고르기에 여념이 없다. 작은 생태습지의 쇠물닭 한 쌍은 태풍이 지나자마자 올해 마지막 번식을 예비하는 듯 둥지 짓기에 바쁘다. 콧등에 빨간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두기라도 하듯 서로 멀찌감치 떨어진 채 말라죽은 갈색 긴 부들줄기를 물어 나르느라 하루가 짧아 보인다.

하이선은 태화강국가정원에 값비싼 교훈 두 가지를 남기고 갔다. 하나는 대나무 간벌 피해다.

전언에 의하면 십리대숲 은하수길 일원의 대나무는 강풍에 20~30%가 쓰러졌다고 한다. 십리대숲 바깥부분은 10여m 간격을 두고 대나무 한두 그루가 쓰러졌다면 내부는 산책로를 중심으로 좌우 5m 반경에서 성한 대나무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피해가 심각했다고 한다. 반대로 삼호철새대숲 등 내부 산책로가 없는 대나무 군락지는 피해가 거의 없었다는 말도 있다.

대나무는 서식밀도가 높으면 세찬 비바람에 잠시 휘어지더라도 강한 탄성으로 다시 일어선다. 하지만 간벌이 이루어진 대숲의 대나무는 간격이 벌어지고 탄성이 약해 쉽게 꺾여 쓰러지고 만다. 대나무의 생태식생을 알지 못하는 무분별한 솎아내기가 빚은 결과로 추정된다.

대나무의 식생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처럼 ‘하나는 꺾기 쉬워도 많은 것은 꺾기 어렵다(單則易折 衆則難?)’는 식물이다. 때문에 대나무의 건강한 생태식생은 현조고(懸祖考), 조손(祖孫), 부자(父子), 양주(兩主)가 함께 살아가는 대가족의 교훈을 떠올리게 한다. 혹자는 이번 대나무 잔혹사를 두고 고층빌딩 사이로 강풍이 지나가면서 속도가 붙어 일어나는 빌딩풍(골바람) 효과를 대숲에 대입시키려 하지만 쉽게 동의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은하수길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한 대나무꺽임의 현상과 현장을 활용하자는 제언을 한다. 인근 삼호대숲과 비교되듯 무분별한 대나무 쏙아 내기가 태풍의 영향을 어떻게 받는지를 체험할 수 있는 교육장으로서 가치가 있는 만큼 피해 현장을 반드시 보존하자는 것이다.

피해 대나무를 살펴보면 대부분 올해 자란 대나무임을 알 수 있다. 내년에 올라오는 죽순은 태풍에 희생된 대나무가 지지대가 되어 태풍에도 쉽게 꺾이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다른 교훈 하나는 태화강국가정원에 무분별하게 이식된 교목(喬木=큰키나무)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사실이다.

‘하이선’은 단풍나무와 팽나무를 뿌리째 뽑아 내팽개쳤다. 키 큰 메타세쿼이아와 미루나무는 허리가 꺾이고 말았다. 배롱나무는 엎어져서 부축해도 일어나지 못하는 처지가 됐다.

국가정원의 오랜 지킴이 왕버들, 나뭇가지에 몸을 숨긴 왕매미의 울음소리가 오늘따라 크게 들리고 맑은 가을하늘이 더 높아 보인다. 하지만 왕버들의 몰골은 비참하다. 여기저기 부러져 널브러진 가지들은 태풍에 시달린 흔적들을 말없이 대변해준다.

‘길가에 집짓기 어렵다’는 속담이 있다. 그만큼 지나가는 행인의 입김이 개입하는 탓에 주인은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태화강국가정원 관리도 길가에 집을 짓는 일만큼 쉽지가 않다. 분명히 요구되는 것은 주인의 객관적 결단이다. 인생여로에서 해보고, 가본 경험이 풍부한 노장(老丈)의 객관적 교훈에 ‘당나귀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저 세월의 흐름에 몸을 맡긴 노인(老人)의 주관적 말에 쉽게 다가가는 ‘팔랑 귀’가 언제나 문제다.

태화강국가정원의 관리는 눈으로 우물을 메우려는 담설전정(擔雪塡井)보다 꾸준히 실천하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이 효과적이라는 생각이다. 무분별한 교목 이식과 대나무 간벌이 주는 교훈을 처음으로 체험했기 때문이다. 태풍 ‘하이선’이 남긴 값비싼 교훈을 저마다 가슴에 새겼으면 한다.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조류생태학박사·철새홍보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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