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어놓은 시간들을 찾아서 ①
묻어놓은 시간들을 찾아서 ①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9.0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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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의 변> 조상의 대의적 삶을 찾고자 했던 울산지역 어느 후손의 생전의 구술 내용을 따라가 본다. 구술의 빈틈을 메꾸거나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서사적 형상과 자유로운 시점을 허용한 소설적 르포다. 매주 연재 13회 분량으로 관련 역사를 찾아내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

※글쓴이가 말하는 ‘어느 후손’이란 이택우 전 전 삼원테크 대표(울주군 두서면 수정길 167-23 ‘덕장산방’ 주인)를 말한다.…편집자 붙임.

1. 쇠부리사업가 이명서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거의 전설이었다. 적어도 장손에게는 그러했다. 고향 일대에서는 재력가로 뜨르르한 할아버지였단다. 점사업 덕분이었다. 토철이나 철광석을 제련하여 쇠를 뽑아내거나 그것으로 쇠붙이 도구들을 만들어 팔던 곳을 점이나 쇠부리라 했다. 할아버지는 여기에 사용되는 철광석, 토철 등의 원료들을 농소의 쇠부리광산에서 가져왔다. 달천철장, 달천철광산 등의 이름으로도 불린 쇠부리광산은 오랜 명성의 그것이 아니던가. 고향 울산에 그런 게 있다는 것은 점 사업을 하는 데에서 더없이 좋은 입지조건일 것이다. 원료나 기술, 인력 등을 아무래도 값싸고 쉽게 이용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울산의 점으로는 우선 그가 나고 자란 마을인 두서면 새터마을 앞을 지나가는 활천의 물가에 있었다. 할아버지의 이력을 얘기해주던 장손은 아쉽게도 몇 해 전 육십 중반을 겨우 넘겨 세상을 떠났다. 살아있을 때 그는 할아버지의 점 자리를 나에게 직접 확인시켜주기도 했다. 활천 물가의 산발치에 있던 터는 지금 밭으로 변했다. 거기 지적도상에 대부분은 임야이고 거기 딱 한 군데가 대지로 되어있다. 지형지물로는 당시의 큰 바위가 남아서 사업장임을 알려준다.

활천은 백운산의 삼강봉에서 발원하여 새터 등 여러 마을 앞을 지나 멀리 형산강으로 흘러드는 개울이다. 이 활천을 따라 형성된 골짝은 제법 길어서 십여 개나 되는 마을들이 그 안에 들어있을 정도다. 자연마을들로 신기마을로도 불리는 새터마을 안팎으로 활천, 양지, 내와, 외와, 당수말, 중점마을 등이 그들이다. 이 긴 골짝에는 예로부터 쇠붙이나 기와 등을 다루어온 전통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를테면 중점리의 마을 이름이 점을 했던 데에서, 내와, 외와마을의 그것들은 기왓장을 구워낸 데에서 비롯되었다. 가까운 거리의 전읍리는 신라 때 쇠붙이로 돈을 만들어냈고 조선조 쇠부리의 상징적 인물인 이의립 선생이 태어난 곳인데, 선생은 경주 이씨 문중의 조상이기도 하다.

마을 사람들은 할아버지가 새터마을 말고서 중점마을의 점 사업에도 가담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사업처들은 사실상 고향 울산 일대를 훨씬 벗어나고 있었다. 경주나 상주 등 영남 일대에서 나아가 새재 너머 수안보, 멀리로는 만주에까지 걸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듯이 할아버지는 국내외에 걸쳐 쇠붙이를 다루고 만들어 내다파는 점 사업으로 큰 재력을 이룬 사업가라 하겠다.

할아버지는 주로 이명서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나들이 때는 흔히 가마를 탔다. 경주, 언양, 울산 사이에 자리한 두서 일대는 예로부터 교통이 불편했다. 봉계시장도 해방 무렵에야 들어서듯 그 전까지만 해도 언양장이 가까운 장이고 더욱 멀리로는 울산장, 경주장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교통이 불편한 지역에서 할아버지 가마는 나들이용으로 안성맞춤이었던 셈이다.

여기 할아버지의 인상적인 가마 풍경이 있다. 가마가 지날 때마다 사람들은 가마가 다가오기 전부터 땅바닥에 넙죽 엎드리곤 했다는 것이다. 그런 대목을 구술할 때 손자의 목소리에는 유독 힘이 들어가곤 했다. 소문이란 사람들의 입을 타고 과장되는 법이다. 평생 기댈 언덕 하나 없이 심지어 머슴살이까지 살아야했던 장손의 처지에서는 더욱 그럴 가능성이 있다. 전설처럼 전해오는 조상을 가진 그런 처지의 핏줄에게 어찌 자부심 묻어나는 과장쯤이야 없을 수 있으랴. 과장이더라도 설득력이 없는 얘기라 도리질할 필요까지는 없다. 농촌 시골에서 농사일밖에 모르는 채로 수탈과 굶주림이 일상화된 당시 사람들의 처지에서 봤을 때에 국내외에 걸치는 큰 사업망을 가진 재력가, 그런 인물이 어찌 평범하게만 보이겠는가.

1880년대 초기에 태어나 1936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의 할아버지가 성년을 보내고 사업활동을 한 시기는 일제강점기에 해당된다. 긴 민족사 중의 짧은 시간이기는 하나 처음으로 이민족에 나라를 몽땅 빼앗겨버린 미증유의 시기가 아니던가. 일본제의 신식 무장 앞에서 갑오년의 농민전쟁이 무너지고 의병전쟁의 피바다가 산하를 물들였다. 직간접의 어느 쪽이든 그 시절 할아버지도 그런 민족적이고 전국적인 격동기를 살아내야 했고, 이어서는 칼 찬 순사와 총 든 헌병으로 숨통 틀어막은 세월도 살아내야 했다.

해방공간에 태어난 장손이 그런 할아버지를 대면했을 리는 없다.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이력에 대한 장손의 얘기는 주변에서 들은 것이다. 간접적인 차원에서는 할아버지의 맏며느리인 어머니를 비롯한 집안 사람들의 얘기이자 고향 사람들과 문중 노인들의 얘기이다. 가사도우미 등 할아버지 사업장의 현장적 인물들의 얘기이기도 하다.

그런 인상적인 가마 풍경에 담긴 의미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돈을 긁어모은 한갓 장사치의 위세에 대한 눈치일까. 아니면 가슴 깊이 우러나온 어떤 존경심일까. ▶2편으로 이어짐

이노형 고래문화재단 상임이사·전 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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