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이별
생이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9.0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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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 너머로 엄마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지 놀라서 물어보니 외할머니의 치매 증세가 악화되어 요양병원에 모시기로 했다는 것이다. 가스레인지에 라이터로 불을 켜고 냄비를 계속 태우는가 하면 마당에 수시로 쓰레기를 모아 불까지 지른다는 것이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나를 잘 못 알아보시는 걸 보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현실이 되고 보니 마음이 착잡했다.

외할머니의 연세는 올해 96세이다. 병세가 있기 전만 해도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법이 없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밭에 콩이며 팥을 심어서 가꾸었다. 엄마의 말대로 하자면, 넓은 집도 명경알같이 깨끗하게 청소를 해놓은 것이다.

허리가 불편한 엄마는 전동차를 몰고 버스로 세 정거장 거리쯤 되는 외할머니 댁에 거의 매일 들러 시간을 함께 보냈다. 외할머니가 좋아하는 곰국을 끓여서 갖다드리고, 기력을 회복하라고 인삼도 사다드렸다. 외삼촌 두 분도 자주 왔지만, 외할머니는 습관처럼 대문 앞에 서서 멀리 강둑을 바라보며 엄마를 기다리곤 했다.

외할아버지가 편찮아서 일찍 돌아가신 후 외할머니는 맏딸인 엄마를 의지해 왔다.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효심이 남달랐던 모양이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가 외할아버지 병간호 하느라 여념이 없을 때, 엄마는 어린 동생들을 재워놓고 둥근 보름달이 뜰 때면 장독대에 정화수를 올려놓고 소원을 빌었다.

“달님, 달님, 빨리 커서 어른이 되어 부잣집에 시집가서 우리 집을 꼭 도와줄 수 있게 해주세요.”

비록 넉넉한 집에 시집간 것은 아니었지만, 농사일이며 채소장사며 쉴 틈 없이 일을 해서 조금씩이나마 외갓집을 도와줄 수 있었다.

“생이별이 얼마나 아픈지 아나?”

엄마는 병원으로 떠나보낼 할머니 생각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코로나로 인해 병문안도 어려울 뿐더러 찾아뵙는다 하더라도 손 한 번 잡아줄 수 없게 되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내가 결혼한 후 20년 동안 외할머니는 해마다 봄이면 쑥을 캐주셨다. 씻고 다듬고 삶아서 주먹만한 크기로 냉동시킨 쑥덩어리로 보약 같은 쑥국도 끓여먹고, 쑥인절미도 해먹을 수 있었다.

올봄엔 코로나 사태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직접 쑥을 캐보았다. 몇 시간 쑥을 캐고 나니 허리가 얼마나 아픈지 외할머니의 수고로움이 새삼 느껴졌다.

검은콩이며 팥이며 손수 농사를 지어서 주신 곡식들이 지금도 냉장고 서랍에 남아있다. 어느 여름날, 마당에 탐스럽게 열린 청포도를 보며 외할머니가 혼잣말을 했다.

“청포도 심어준 사람은 죽고 없는데, 해마다 청포도는 열리네.”

그날 내가 “우와! 우리 외할머니 시인이네.” 했을 때 환하게 웃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젠 마당에 연둣빛 청포도가 열려도, 담장 위에 어른 엉덩이만한 호박이 누렇게 익어가도, 주인이 없으니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생이별이란 엄마의 말에 덜컥 가슴이 아려온다. 봄날이 가는 것처럼 여름도 이렇게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천애란 사단법인 색동회 울산지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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