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하지만 할머니’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8.3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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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에는 어느 때보다 화젯거리가 많다. 8월 들어 매스컴의 주제어들을 보면 ‘애호박 하나에 5천원…하지만 농민 소득은 제자리입니다’, ‘내일까지 장맛비 소강…하지만 안심할 수 없다’ , ‘한국에서는 백선엽을 중심으로 한국전쟁이 서술된다. 하지만, 제대로 부각되지 않은 측면이 있다.’ 이같이 우리말에서 ‘하지만’이 빈번히 사용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하지만’이라는 말은 흔히 일상대화에서 앞말의 내용에 대하여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토를 달거나 할 때 자주 쓰인다. 예를 들면 ‘난 나를 따끔하게 채찍질할 수 있는 차가운 도시남자. 하지만 내 여자한텐 따뜻하게 해주겠는데… ’와 같다.
흥미롭게도 이 말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정중히 사과한 후 자주 붙여 말하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백수라서 미안해요. 하지만 금방 일어날게요.’, ‘미안해요, 사랑해요. 하지만 난 엄마처럼 살기 싫어요.’ 그렇게 말하는 순간 사과의 질이 떨어지거나 내 책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네게도 책임이 있다는 뉘앙스가 깔린다. ‘진정성’이 일순간 바람처럼 날아가 버리게 된다.
원래 ‘하지만’은, 앞뒤 내용이 서로 일치하지 않거나 상반되는 사실을 나타낼 때 쓰이는 말이다. ‘내 방 시계는 고장 났어. 하지만 안방 시계는 고장 나지 않았어.’와 같다.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이 양보적인 대립의 뉘앙스를 풍기기도 한다. ‘이 우화는 꾸며낸 이야기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교훈은 현실을 사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더욱이 ‘지금부터 노래를 부르자. 하지만 작은 소리로 부르는 거야.’와 같이 조건의 의미가 도드라지는 표현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에 대한 어용론적 이야기를 했는데, 공교롭게도 서명이 ‘하지만 하지만’으로 시작되는 흥미로운 책 한권이 서점 점두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원제, だってだってのおばあさん, 1975)라는 상상의 그림책. 경박하지 않으면서도 가볍고 재기발랄한 글을 많이 남긴 그림작가 사노 요오코(佐野洋子, 1938~2010)의 작품이다. 그의 작품에는, 느긋하고 편안한 선과 따뜻한 색채로 인간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을 보여주는 책들이 많다. 그중 이 책은 우리들에게 삶의 지혜를 잔잔히 띄워주는 아름다운 책이라 할 수 있다.
어느 마을에 5살 고양이와 98세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할머니는 ‘하지만 난 98살인걸! (아무것도 할 수 없어!)’이라면서 늘 허탈하게 말한다. 99살 생일날, 케이크에 꽂을 양초를 사러간 고양이 녀석이, 그만 잘못하여 달랑 5개만 들고 온다. 그날 이후 할머니는 5살 어린아이로 되돌아가 살게 된다.
늘 가는 고양이의 고기잡이에 할머니도 마지못해 따라나선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는 94년 만에 고기잡이를 하는 셈이 된다. 돌연 다섯 살 어린아이가 되니 할머니는 어쩐지 나비가 된 것 같고, 어쩐지 새나 물고기가 된 것 같다고 한다.
“내가 왜 좀 더 일찍 5살이 되지 못했을까?”라며 자신을 후회한다. 더욱이 ‘하지만 하지만’이라고 자기를 나이 속에 자꾸 가둬두고 있었던 건 아니었나 한탄한다. 나이를 먹어도 하고 싶은 걸 다 하게 되었다는 상상의 이야기다. 그건 곧 ‘마음가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겠나.
우리의 삶에서 하지만 하지만 하고 망설였던 것, 머뭇거렸던 일. 그런 일들은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고승 원효대사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뭐가 다르겠는가. 비록 해골에 담긴 빗물을 마셔도 마음먹기에 따라 정화수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에 찬 ‘마음’이 소중한 것이다. 

김원호 울산대 명예교수·에세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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