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알았네, 어머니를 ‘보살님’으로 부른 이유를
이제야 알았네, 어머니를 ‘보살님’으로 부른 이유를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8.30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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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2학년 때쯤으로 기억한다. 이른 여름, 어머니를 따라 절을 찾았다. 마을에서 산을 오르고 내를 건너 한참을 걸어가서야 당도했다. 날씨도 덥고, 이마에 땀도 났다. 어린 생각에 괜히 따라왔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집에 있어도 딱히 할 일은 없었다. 따라나선 이유 딱 한 가지를 들라면 사탕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말이 내 귀를 솔깃하게 했기 때문이다. 물론 집에서도 먹을 수 있는 사탕이었지만, 그날 무엇이 씌었는지 작두를 타고 말았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작은 암자였다. 법당에 들렀다.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이쪽저쪽을 향해 절을 했다. 법당은 선 채 방향만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어머니의 말씀은 공부 잘하고 건강하게 해준다는 등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코뚜레한 송아지 신세인 줄 눈치 채고 흥·배(興·拜)를 시키는 대로 따라 했다.
이윽고 법당을 나선 어머니가 스님과 마주쳤다. 스님이 “보살님! 오셨어요” 하며 반겼다. 이때부터 나는 당황스러워졌다. 어머니를 ‘보살님’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이상하다, 왜 어머니를 보살님이라 부를까? 궁금증은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도 머릿속을 맴돌았다. 혓바닥을 붉게 물들이는 사탕을 녹여가면서 반쯤 새나가는 소리로 어머니를 불렀다. “엄마, 엄마 보고 와 스님이 보살님이라 하는데?” 엄마가 즉답을 했다. “내가 아나. 절에서는 보살이라 부르데…” 더는 묻지 않았다. 입속 가득한 사탕으로 침이 흐른 탓이다.
1984년 불국사 불교전통강원 대교과 4년을 졸업했다. 대교과에서 <화엄경>을 공부했지만 궁금증은 무지개 일곱 띠쯤 사는 나이에도 계속됐다.
대승불교 <화엄경>에서는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어가는 단계를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의 52위(位)로 나눈다. 또한 <화엄경> 중 「입법게품」에 나오는 선재동자가 53 선지식을 찾아가는 과정은 바로 이 대승 52위를 나타낸다. 선재가 처음과 마지막에 문수보살을 친견하게 되니 결국에는 52 선지식을 만나게 된다. 선재가 오십 두 분의 선지식을 만날 때마다 한 단계씩 나아가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수행 52위는 <화엄경(華嚴經)> 외에 <법화경(法華經)>,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 <능엄경(楞嚴經)>, <범망경(梵網經)>,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등에서도 설하고 있다. 즉, 52위는 보살(菩薩)이 처음에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면서부터 인행을 닦고 수행의 공덕을 쌓아 부처의 과보를 이루기까지의 계위(階位)를 일컫는 비유이다.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대상 근기에 맞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다시 묻는다. 왜 절에서는 어머니 혹은 여성을 보살이라 부릅니까? 누구도 간단명료하게 즉답하지 못했다. 사례를 통해 어머니가 보살로 불리는 이유를 설명하겠다. <화엄경>에서 수행 52위(位)를 마중물삼아 어머니가 절에 가면 보살님의 칭호를 받는 이유를 ‘자기 논에 물 대기’식 즉, 아전인수(我田引水)로 풀이한다.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믿음 하나로 시집을 왔다. 새색시 시집살이는 눈멀고, 귀먹고, 말 못하고 들어도 못 들은 척, 맹롱음아(盲聾瘖瘂)의 세월 십 년이었다. 그 후 남편 뒷바라지, 자식 키우기로 보낸 산전(山戰) 10년, 수전(水戰) 10년, 공중전(空中戰) 10년, 지하땅굴전 10년을 보태면 50년 인생 전쟁을 인행(忍行)으로 이겨낸 셈이다. 당연히 어머니는 부처 아래 51위, 등각(等覺) 자리인 보살위(菩薩位)일 것이다. ‘이제야 알았네, 어머니를 보살님으로 부른 이유를….’ 그러나 어머니라는 이름만으로 보살위가 될 수는 없다. 어머니의 자격은 물론 책임과 의무 등 역할의 세월을 같이해야만 한다. 그 세월에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의 반질거리는 마룻바닥이 깔려있어야 한다.
불교는 일찍부터 부부를 양주보체(兩主保體)라 부르며, 남녀평등 사상과 현실적 비유로 설법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어머니를 보살님으로 부르는 것도 증명된다. 이는 남녀평등 사상과 보살위가 가상이 아닌 현실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쉬운 것은 부처님이 평생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춰 하는 설법 즉, 수기설법(隨機說法)으로 가르쳤지만, 부처를 대신한 제자의 법문 혹은 설법은 관념적·추상적으로 세습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학문적 대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법수(法數)를 중심으로 난해(難解)하게 접근하는 일이 다반사이니 한심한 일이다.
비유는 경험적 접근에 바탕을 둔 현실적인 것이라야 설득력이 있다. 매년 화엄산림에서 이해하는 척 손뼉 치고 고개 끄덕거리며 소리 질러주는 청중들의 과장된 행동에 만족해하는 착각에서 빨리 깨어나야 하는 이유이다. 늦었지만, 시대적으로 사회상을 바탕으로 현실적이며 대상의 근기에 맞는 비유로 법을 전하는 법사를 양성해야 한다. 절에서 어머니를 보살님으로 부른 이유를 불쑥 묻는 초등학생에게 지식적 접근으로 보살 수행과정의 52위를 장황하게 설명하려는 무모함보다 대상 근기에 맞는 현실적 답변이 바로 불교가 지향하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조류생태학박사·철새홍보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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