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학교와 성세빈 선생, 우리 함께 기억하자
보성학교와 성세빈 선생, 우리 함께 기억하자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8.20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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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독립투쟁은 국내외에서 다양하게 전개됐다. 전국에서 항일의병이 봉기해 이후 독립군으로 이어졌고, 특사를 파견해 외교투쟁을 전개하기도 했으며, 지식인들은 계몽운동으로 구국전선을 형성해 항쟁했다. 전 민족이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비폭력 3·1만세운동과 민족 고유의 문화를 수호·육성하기 위한 민족문화수호운동도 있었다. 군사와 경찰에 의한 무력통치, 문화통치 등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도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투쟁은 계속됐고, 결국 해방이라는 결과를 얻었다.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해 투쟁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희생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우리의 역사다.

울산 동구에도 소중한 독립운동의 역사가 있다. 바로 지역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지가 됐던 민족사립학교 ‘일산리 보성학교’다.

보성학교는 1909년 대한매일신보에 학교 운영을 위한 기금 모금 광고와 함께 의연금 모금에 참여한 분들의 명단이 실려 있어 1909년 처음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1912년 모종의 이유로 폐교됐다가 1922년 5월 다시 문을 열었다. 이후 1945년 폐교될 때까지 총 21회에 걸쳐 49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동구 출신으로 유일하게 서훈을 받은 서진문 선생(건국훈장 애족장)과 이효정 선생(건국훈장 포장)이 아이들을 가르쳤고, 박학규, 김천해 선생 등 울산에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을 펼쳤던 항일독립운동가들도 교원으로 재직했다.

보성학교는 학교의 기능뿐만 아니라 사회운동의 중심지 역할도 했다. 울산청년회, 동면청년회, 방어진청년회 등 청년회가 여럿 조직됐는데 동면청년회와 울산청년동맹 동면지부, 적호소년회, 신간회 울산지회 동면지부 등의 사무실이 모두 보성학교 내에 위치했다. 교원들 대부분이 청년회와 신간회에서 활동했고 학생들도 어렸을 때부터 적호소년회 등에 참여했다.

이 보성학교를 설립한 사람은 성세빈 선생이다. 선생은 3·1만세운동 이후 항일정신 계승과 실력 양성을 위해 전국적으로 야학 설립이 이어지자 1920년 4월 일산리에 처음으로 노동야학을 만들어 문자보급 운동을 펼쳤다. 또 울산군청년연맹 집행위원과 검사위원, 동면지역 5월 청년동맹 집행위원장, 신간회 울산지회 초대 부회장과 집행위원 등을 지내며 항일투쟁과 농촌계몽, 교육운동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또 경성종로경찰에서 일본으로 보낸 ‘조선의 요시찰 인물 경성 종로경찰 조사서’에도 선생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보성학교와 성세빈 선생은 이 같은 역사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2018년 울산지역 대표 독립운동가들의 재조명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진 이후 후손들과 동구청이 선생의 서훈 지정을 국가보훈처에 건의했음에도 지정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보성학교의 현충시설 지정에 대한 요구가 있었지만 2년이 지난 현재까지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널리 알려진 애국지사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이해해 왔다. 유관순, 김구, 홍범도, 김좌진, 안중근, 윤봉길 등 이름만 대면 그들의 업적이 머릿속을 지나간다. 유명 독립운동가를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누군지도 모르는 더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해 누구는 평생을, 누구는 목숨을 바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보성학교와 성세빈 선생의 역사를 제대로 재조명하기 위해서는 동구주민들이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내가 사는 곳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동구청, 선생의 후손들, 일부 시민단체만이 지켜가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동구주민들이 기억하지 않으면 보성학교와 성세빈 선생을 기리기 위한 불씨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유봉선 울산 동구의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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