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화가의 ‘명불허전’
어느 화가의 ‘명불허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8.1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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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지에 가로 세로 대각선, 마음 가는대로 맹물을 칠한다. 페르시안 블루인지 인디고 블루인지 모서리에서부터 가로로 칠한다. 잠시 마르게 눕혀둔다. 커피 한잔 마실 정도의 잠깐의 시간을 보낸 뒤, 티슈 한 장을 집어들고 구름조각을 만든답시고 군데군데 닦아낸다. 구름 모양이 아련히 떠오른다. 먼 풍경 속에 가로로 검정선을 그으니 한겨울 눈 쌓인 오두막집이 만들어진다. 신기하다. 도화지 위에서 일어나는 수채화의 기이한 현상이다.

최근 난 부지런히 기고하던 정기칼럼을 잠시 쓸 수 없게 됐다. 생각거리가 떠오르지 않아서다. 10여년을 많을 땐 한 달에 서너 편, 적을 땐 한 편을 꼭 썼다. 씨름선수로 말하면 에너지가 다 소모해버린 거와 비슷하다. 싸움소가 퀘렌씨아라도 찾아 휴식을 취하러 가는 안식의 방법을 취해야 될까 싶다.

아니면 달리(S. Dali)와 같이 엄지와 검지로 포크를 집어들고 눈을 감고 명상을 해볼까도 한다. 깜빡해서 아래에 놓여있는 접시에 떨어지면 그 사이 번쩍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방법이다. 잘 될지 모르지만 한번 시도해 보려 한다.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고 고민 끝에 색다른 호기심이 발동되었다. 전혀 다른 분야를 관찰해보는 일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다. 낯설게 한번 시도해보면 참신한 아이디어가 구슬 꿰듯 나올 것 같다.

진한 색감이 묻어나는 유화 붓을 도화지에 그어보고, 아니면 수채화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보는 것도. 아니면 파스텔의 오묘한 그림이나 일러스트에도 기웃거려 볼까 한다. 이미 미술이라는 장르도 별세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최근 어느 미술학 박사가 손수 화폭에 담는 과정을 처음부터 눈여겨본 적이 있다. 어쩜 저렇게 알기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 나가는지 넋이 나가는 듯했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는 명언이 맞았다. 시연을 하면서 해설하는 노련한 그의 재능에 부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붓으로 점 하나 찍으니 바닷가 하얀 등대가 되고 막대기 하나를 그으니 전봇대가 됐다. 엷게 색을 바르니 시들어져가는 시골 방앗간이 되는 신기함. 이건 분명 햇병아리들은 꿈꿀 수 없는 기교가 아니던가. 하루아침에 이런 기법이 나오는 것이 아닐진대 아마추어의 가슴은 내내 졸였다. 정말 명불허전이다.

‘명불허전’이라는 말은, 중국 한나라 사마천이 등주 지역을 방문했을 때 여행소감을 사기에 기록한 말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맹상군이 손님을 좋아하고 스스로 즐겼다더니 그 이름이 헛되지 않도다!(世之傳孟嘗君好客自喜 名不虛矣)”라고. 제나라 왕족 출신으로 춘추전국시대 4공자인 맹상군은 인재를 후하게 대접하여 수천의 식객을 거느린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이름이 날만한 까닭이 분명 있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명성이나 명예가 널리 알려진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 익히 듣던 대로 뛰어나거나 그에 걸맞은 타당한 이유가 있을 때 표현하는 말이다.

생뚱맞은 이야기 하나 하자. 우리말에 자주 쓰이는 이 같은 ‘~은 명불허전이야!’라는 표현을 영어로 번역하면 재미난다. ‘그렇게 소문이 난 것을 보면 정말이지 사실이야!’(‘It is quite true as I have heard that~’)로 옮긴다니 영어문장의 오묘함이 더한다.

글쓰기가 잘 되지 않을 땐 펜을 들고 무조건 써보는 것도 하나의 지혜다. 무엇이든 써보면 곧 쓸 만한 글이 되는 재목감이라는 것이다. 미술이든 무엇이든 명불허전의 기교도 곁눈질 해보면 삶에 생기가 나듯 지혜에 타산지석이 될 수 있다.

김원호 울산대 명예교수·에세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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