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리, 부질없는 이 머리털…
미투리, 부질없는 이 머리털…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8.02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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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이 아버지에게>, <귀촉도>, <꼬마인형>을 읽고 들으면서 차례로 연결시켜 상상의 나래를 폈다.

그대를 스쳐본 순간, 그녀는 가슴이 매우 떨렸다. 순간, 숙명처럼 사랑에 빠질 것을 예감했다. 그대의 눈빛과 미소 그리고 촉촉한 목소리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녀의 예감은 현실로 나타났다. 손 없는 날, 황촛불 아래 꽃잠을 맞이했다. 합환주에 홍조 띤 그녀의 귀밑머리는 그대의 손 온기에 떨잠을 파르르 떨게 했다. 그날 밤이 꿈처럼 지났다. 어느새 그녀의 가슴에는 작은 그대가 신맛을 당겼다. 사랑의 역사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1998년, 경북 안동시에서 택지개발사업을 진행했다. 현장의 많은 무덤들이 이장됐다. 그 해 4월 그 중 한 무덤이 세인의 관심을 모았다. 관 속에는 편지, 미투리 등 다양한 부장품이 들어있었다. 무덤 주인을 조사한 결과 고성 이씨 가문의 이응태라는 선비의 묘로 확인됐다. 이응태(李應台·1556∼1586.6.1)는 31세에 세상을 떠났다. 편지 중에는 미망인이 쓴 편지도 있었다. <원이 아버지에게 (올리는 편지)>로 풀이되는 이 편지는 남편의 장례를 치르기 전 미망인이 급히 써서 관에 넣은 것이었다. 편지 내용 중 가슴 아픈 사연의 일부는 이러하다.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고/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는가/ 자네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소…”

미망인은 뱃속에 자식을 안고 있었다. 여러 말이 필요 없었다.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소”라는 말 외엔. 또한 시신 옆에는 아내가 자신의 머리카락과 삼을 섞어 만들었음을 짐작케 하는 미투리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미투리는 네 날 짚신보다 촘촘한 여섯 날로 짜여 있었다. 무덤 속 부장품의 미투리는 먼 길을 떠나는 망자를 위한 신발인 셈이다.

그 후 공교롭게도 미망인이 망자를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 미투리를 삼아 준 내용을 담은 시<귀촉도(歸蜀途)>가 357년 만에 탄생했다. <귀촉도>는 1943년《춘추》10월호에 발표된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1915∼2000)의 시(詩)다. 미당은 원이 어머니의 서러운 사연을 알고 있은 듯하다.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임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 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임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 리// 신이나 삼아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굽이굽이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임아”(미당의 ‘귀촉도’ 전문)

미당은 머리카락으로 삼은 미투리를 원이 엄마의 한 맺힌 가슴의 표현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소”에 감정을 이입시켜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임아”로 덧씌웠다.

원이 어머니의 서러운 마음을 미당만 달래준 것이 아니다. 가수 최진희도 있다. 최진희는 미당의 뒤를 이어 <꼬마인형>으로 서러운 미망인을 달래주었다. 귀촉도 발표 후 51년 만이다.

“그날 밤 황홀한 시간을/ 난 잊을 수가 없어요/ 세상에 태어나서 맨 처음/ 당신을 알고 말았죠/ 말없이 흐르던 눈물을/ 난 감출 수가 없었네/ 창문에 부딪히는/ 빗방울을/ 하나 둘 세고 있었죠/ 늦어도 그날까지/ 약속만을 남겨둔 채로/ 밤이 지나고/ 새벽 먼 길을/ 떠나갈 사람이여/ 부서지는 모래성을/ 쌓으며 또 쌓으며/ 꼬마인형을 가슴에 안고/ 나는 기다릴래요”(최진희의 노래 ‘꼬마인형’)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고-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임아-꼬마인형을 가슴에 안고 나는 기다릴래요…….’ 이 말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메아리로 다가오는 듯하다.

간혹 부부의 인연을 쉽게 생각하고 가볍게 행동하는 것을 볼 때가 있다. 그때마다 그대, 원이 아버지 없는 그녀, 원이 어머니의 삼단 같은 머리카락이 얼마나 부질없는 머리털이 되는지를 이야기해 주고 싶다.

오늘도 어디선가 밤이 지나고 새벽 먼 길을 떠난 그대, 원이 아버지의 꼬마인형을 가슴에 안고 기다리고 있을 그녀, 원이 어머니를 생각한다.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조류생태학박사·철새홍보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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