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날 소곡(小曲)
복날 소곡(小曲)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7.19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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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 가운데 ‘단고기’라면 오족을 못 쓰는 양반이 있다. 며칠 전 그분이 짤막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내일 점심, 같이’라는 청이었다. 궁금해서 되물었지만, 대답은 예측을 빗나가지 않았다. ‘내일이 복날’이라는 것. 알고 보니 그 ‘내일’은 ‘복달임 마니아’들의 축일 ‘초복(初伏)’이었다. 그런데 지인이 선약을 스스로 파기했다. 내가 단고기를 멀리한다는 것을 뒤늦게 간파해서일까?

‘단고기’라면 한중수교(韓中修交) 전 창바이산(長白山=백두산·白頭山)에 오르던 날 처음 접한 낱말이다. 그날 나는 창바이폭포 구경에 나서려던 한국기자협회 지방대표단 2명을 억지로 주저앉히고는 관광버스 주차장 구내식당의 ‘랭면(冷麵)’ 간판을 가리켰다. 그들도 흔쾌히 동의했다. ‘장바이산 랭면은 과연 어떤 맛?’

그것도 잠시. 식욕은 이내 호기심으로 변했다. 차림표의 글자 ‘단고기’ 탓이었다. ‘단-’자라니? 고기 맛이 달다는 말일까? 한족(漢族) 처녀가 가마솥 뚜껑을 여는 순간 일행은 눈부터 의심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단고기’의 정체가 견공(犬公)의 몸통이었던 것. 시골부엌 내음 물씬한 식탁에 둘러앉은 일행은 중국식 랭면 맛만 대충 보고는 부리나케 자리를 떴다.

초복인 16일 한 언론매체는 인상적인 장면을 사진기사로 올렸다. 제목은 ‘복날 사라져간 누렁이를 추모하며…’. 복수의 동물보호단체 회원들이 청와대 분수대광장에서 ‘누렁이 대학살 추모 퍼포먼스’를 펼치는 장면이었고, 그들의 겉옷에는 ‘개도살 철폐’ 글씨가 선명했다.

친근한 표현 ‘누렁이’의 한자말은 황구(黃狗)다. 조선조 때만 해도 황구는 견줄 데 없는 최상의 친정나들이 선물이었다. 시집살이 3년을 참고 견디며 보낸 며느리가 ‘특별휴가’를 얻어 친정집을 다니러갈 때 시댁에서 정성스레 챙겨준 선물은 토실토실한 누렁이였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세월에는 장사가 없기 마련. 한국의 보양식 문화에도 거센 변화의 바람이 들이닥쳤다. ‘육체파 여우’, ‘섹스 심벌’에서 동물애호가로 변신한 브리지트 바르도(1934~, 프랑스 여배우) 여사의 쓴 소리도 그런 바람 속에 섞여 한반도에 상륙했다.

1999년 6월, 한국에서 ‘보신탕 법제화’ 움직임이 한창일 때 만65세의 그녀는 “사람과 가장 친한 친구를 먹는다는 것은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존엄성의 문제”라며 분노를 터뜨렸다. 하지만 3년 후인 2002년 여름, ‘장미의 이름’의 저자 움베르토 에코(1932~2016, 이탈리아 철학자·소설가)는 바르도 여사를 ‘파시스트’라고 몰아붙였다. 계간문학지 ‘세계의 문학’과의 대담에서 그는 “어떤 동물을 잡아먹느냐의 문제는 인류학의 문제”라고도 했다.

그러나 2020년 이 시점, 전통 한국적 보신(保身)문화의 주류들은 설자리를 잃어가는 느낌이 짙다. 지난 13일, 자카르타 발 외신은 인도네시아 여의사 수사나 소말리(55) 여사가 도축 위기의 개를 11년째 구조해 왔고, 지금도 그런 개 1천400마리를 돌보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도축위기견들은 도축업자에게 돈이나 다른 고기를 주고 구출해왔으나 코로나19 사태로 어려움이 극에 달했다는 것. 난처한 것은 그 기사 속에 ‘현지 한국식당’이 등장한 점이다. 수사나 여사는 “이달에도 현지 한국식당으로 향하는 개 수십 마리를 구조했지만, 매번 제시간에 구출하지는 못한다. 최근 한 정육점으로 달려갔지만, 도착하기 전에 이미 도살이 됐더라.”고 안타까워했다.

삼복(三伏)의 첫 단추는 이미 풀렸다. 하지만 ‘복날 마니아’들에겐 아직 중복(中伏), 말복(末伏)이 새색시처럼 대기하고 있다. 이 실타래 같은 사연의 복날이 언제쯤 동물복지 사전에서 사라질지, 팔순의 브리지트 여사는 알고 있을까?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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