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과 쌓임…‘내가 전화앵(?花鶯)이다’
흐름과 쌓임…‘내가 전화앵(?花鶯)이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7.12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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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이란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는 뜻을 지닌 낱말이다. 표현상 높은 곳의 물이 아래로 흐르는 자연현상에 비유하곤 한다. 그렇다고 흐름이 자연현상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 고부(姑婦), 부자(父子), 형제자매, 노소(老少)가 서로 소통하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쌓임’이란 표현상 하얀 눈이 소복소복 층으로 쌓이는 현상을 말한다. 예를 들면, 화실 작업에서 에폭시(epoxy)의 반복적 레이(lay·쌓다), 스트레스, 앙금, 데이터(data), 원한 등으로 비유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흐름과 쌓임이란 낱말을 일반적 표현, 본래의 의미와는 달리 접근하려 한다. ‘흐름’은 물레방아를 돌리지 않고, 벼도 키우지 않으며, 그저 흘러감을 말할 뿐이다. ‘쌓임’은 쌓여짐이 지속된다는 의미로 접근하겠다.

매일 새벽 같은 장소를 지나가는 노인은 손에 쥔 라디오를 통해 <나그네 설움>과 <저 하늘 별을 찾아> 등 두 곡을 이어서 듣는다. 노인이 볼륨을 높인 탓인지 그 소리는 멀리서도 분명하게 들린다. 한때 불러서 익숙해진 노래이기에 때로는 따라 흥얼거리기도 한다. 나그네 설움은 다가오는 노래이며, 저 하늘 별을 찾는 필자의 등 뒤로 스쳐지나가면서 점차 멀어져가는 노래다.

1940년, 조경환 작사·이재호 작곡으로 백년설이 부른 나그네 설움은 시대의 아픔을 표현한 대중가요다. 하지만 시대적 배경을 제쳐두고 1절 첫 소절 가사를 인용하면,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이다. 분석해보면 오늘도 어제처럼 걷지만 방향과 목적이 없다는 말이다. 구태여 이를 인용한 것은 이 노랫말에서, 방향성과 목적성이 배제된, 단순한 흐름의 사례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다음의 노래로 이어질 수 있다. ‘오늘은 어느 곳에서 지친 몸을 쉬어나 볼까 갈 곳 없는 나그네의 또 하루가 가는구나~’ 인용한 가사는 2001년, 박성훈 작사·작곡으로 유지나가 부른 ‘저 하늘 별을 찾아’의 첫 소절이다. ‘지친 몸’과 ‘갈 곳 없는 나그네’라는 표현에서는 정년퇴직자의 독백 같은 것도 느낄 수 있다.

여기에다 1958년, 김운하가 작사하고 한복남이 작곡하고 손인호가 <물새야 왜 우느냐>으 노랫말 ‘물새야 왜 우느냐∼유수 같은 세월을 원망 말아라∼’를 부르며 지나간다고 하자.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동안 막연하게 멀리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던 저승길[路]이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4차선 아스팔트길[道]이 되어 내 앞에 펼쳐졌음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만다.

이들 세 곡의 공통점은 무의미의 흐름으로 느껴진다는 점이다. 무의미한 흐름은 흐르는 물 같은 유수(流水)다. 인생 노숙(老熟)의 경험에서 한 해 세(歲)와 한 달 월(月)을 흘려보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될 때면 쫓아가는 필자의 세대도 남의 일만 같지는 않다고 느껴진다. 서예대전에서 ‘무정세월약류파(無情歲月若流波=무정한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구나)’란 글귀 앞에서 서성거리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쌓임은 ‘적(積)’으로 지속의 의미다.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 ‘마당의 노적(露積) 볏가리를 쌓는다’와 같은 표현은 감성적 접근의 쌓임이다. 믿음을 바탕으로 어려운 과정을 거쳐 지속적인 실천으로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황벽 선사가 읊은 “한번 뼛속에 사무치는 추위를 겪지 않고서야/ 어찌 매화향기가 코끝 찌름을 얻을 수 있겠는가(不是一番寒徹骨 爭得梅花撲鼻香)”라는 시는 군더더기가 없는 대표적인 인용이다. 자연환경적으로 접근해보면, 퇴적(堆積)과 충적(沖積)은 모두 평야(平野)를 만든다.

‘내가 전화앵(?花鶯)이다!’란 말 속 ‘전화앵’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 경주부 고적 조에 나온다. 바로 “悅朴嶺在府南三十里東都妓?花鶯所埋之地(=열박령은 부로부터 남쪽 30리에 있는 곳으로, 동도 기 전화앵이 묻힌 곳이다.)”란 표현이다.

전화앵을 기리는 ‘전화앵제’는 2002년 울산학춤보존회에서 처음으로 개최한 이래 18년을 쌓아 왔다. 올해(2020년)는 울산대 섬유디자인학과 학생들이 학과 창설 32주년 기념 기획전 ‘내가 전화앵이다’를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울산대 예술관 1층 31화랑에서 마련했다. 화랑에는 학생들이 지난 3월부터 작업한 자화상 20여 점이 걸렸다. 이번 전시에서는 김언배 교수(울산대 섬유디자인학과)의 지도를 받은 이 학과 학생 18명이 자신과 전화앵을 동일시해서 완성한 자화상들을 선보였다. 필자는 학(鶴) 유조(幼鳥·부화 2개월) 두 마리와 동참했다.

이번 전시는 2019년 울산대 섬유디자인학과 창설 31주년에 이어 두 번째로 마련한 기획전이었다. 18년 전, 역사 속 인물이었지만 기생의 굴레에 천착한 이들의 열 가지, 백 가지 핑계 때문에 오랜 세월을 무의미한 흐름에 맡겨질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주인공이 전화앵이었다. 그러나 전화앵제는 이제 울산학춤보존회와 학문의 전당 울산대 예술대학 섬유디자인학과 학생들의 애정 어린 보살핌으로 차곡차곡 쌓임의 나이테를 더해가고 있다.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조류생태학박사·철새홍보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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