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당 협치 가능하도록 원내대표제 신설 추진할 것”
“양당 협치 가능하도록 원내대표제 신설 추진할 것”
  • 김정주
  • 승인 2020.06.30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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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석 민선7기 울산광역시의회 후반기 의장
박병석 민선7기 울산광역시의회 후반기 의장.
박병석 민선7기 울산광역시의회 후반기 의장.

 

묘하게도 한글이름이 현 국회의장과 한 자도 안 틀린다. “후반기 의정, 한번 멋지게 펼쳐 보시오.” 지인들의 덕담 내용이 이런 데는 그런 이유도 한몫을 한다고 들린다.

황세영 직전 의장의 바통을 이어받아 민선7기 울산광역시의회의 후반기 2년을 이끌어갈 박병석 후반기 의장(54). 만나기로 한 날은 취임 나흘 전인 6월 27일 오전, 약속 장소는 의사당 2층 그의 의원연구실이었다. 하지만 이날따라 2층 의원연구실 전체는 ‘출입 불가’ 구역. 작업인부 몇 분이 문패 떼고, 짐 빼고, 바닥 청소하고, 집기 정돈하는 작업을 한 날 한 시에 해야 하느라고 그랬다. 궁여지책으로 옮긴 자리는 의사당 4층 다목적회의실. ‘사진빨은 잘 안 받더라도’ 인터뷰는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현대차 입사 전 가방공장 시다도 좀…”

말에 거침이 없고 솔직담백하다. 체구도 별명도 굳이 감추려 들지 않는다. 겸손함과 붙임성은 그의 인간적 매력 중 하나다. 일본어 사용빈도가 높은 건 그의 지난날과 무관치 않다.

“강원도 삼척 근덕면이 고향인데 88년 2월에 제대하고 그해 10월 현대자동차 소재금형부에 입사했지요. 그 전엔 부산 동래 빽(가방)공장에서 잠시 일했는데 여공들 ‘시다’ 노릇 좀 했고요. 낮에 공부하고 밤에 일하는 여학생들의 뒤치다꺼리를 제가 맡아서 했던 거지요.”

어릴 때부터 고향에서 소꼴도 베고 나무도 했다. 그러다가 근덕중, 근덕농고를 거쳐 포항 직업훈련원에 입학했다. 용접, 배관, 기계조립(공구연마) 기술을 배운 것도 바로 이 무렵의 일. 그렇게 쌓인 경험들은 나중에 현대차와 인연을 맺는 과정에서 비옥한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현대차 입사 전에는 주물가공 기술도 익혔다. “지금의 롯데마트 사거리 근처에 있었던 작은 기계제작 공장이었는데 금형 뜨는 기술을 연마했지요.”

그래서일까, 일본말이 자연스럽다. ‘마찌코바’(まちこうば=町工場, 영세공장)도 ‘야스리’(やすり= 목재나 금속을 갈거나 다듬는 데 쓰는 공구)도 그의 땀 냄새 찌든 전문용어의 토막들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생산현장에선 일본말이 주로 쓰일 겁니다.”

박병석 신임 후반기 의장 주관으로 전반기 때 열린 울산대중교통 혁신 및 발전방안에 대한 의견수렴 간담회. 사진제공=울산시의회
박병석 신임 후반기 의장 주관으로 전반기 때 열린 울산대중교통 혁신 및 발전방안에 대한 의견수렴 간담회. 사진제공=울산시의회

 

1998년 ‘사수대장’에서 ‘폭력방’ 신세로

어찌 보면 좀 엉뚱한 구석이 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많은’ 편이다. 1991년 3월 한국방송통신대 농학과에 지망해서 학사학위(학사 13기)를 따낸 일도 그런 사례의 하나. “1년을 더 해서 6면 만에 졸업했는데(당시는 5년제), 영어 때문에 고생 좀 했습니다. 농고 출신이다 보니….” 그러면서 씩 웃는다. 웃음에 꾸밈이 없다.

하지만 근면과 끈기로 치면 둘째가라면 서럽다. 아무나 못한다는 ‘대의원’ 직을 현대차 입사 2년 만에 처음 거머쥐었고, 대의원 당선 횟수만 자그마치 7차례(4·5·6·7·8·10·18대)나 된다.

‘1998년’은 박병석 의장의 인생사에도 굵은 획이 그어진 한 해였다. 현대자동차에서 ‘정리해고’의 칼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박 의장은 현대차노조 ‘제7대 김광식 집행부’의 산업안전부장이면서 ‘사수대장’을 동시에 맡았고, 이 때문에 그해 6월부터 36일간은 총파업의 선봉에 서야 했다. 사측 정리해고에 맞서 노조원을 사수한다는 것은 손에 쇠파이프를 들고 극한투쟁에 나서는 것을 의미한다. 박 의장은 당시 모집에 응한 사수대원이 1천명을 넘어섰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국의 언론매체들은 현대차 사내 천막투쟁에 노조원들의 가족들까지 응원 나온 장면을 카메라에 담기에 바빴다. 사수대장 박병석의 세 살 난 어린 딸과 둘째아이를 가진 부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임무 수행은 마쳤지만 그에게는 또 다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폭력 등’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이 떨어진 상태였고, 8월 31일 덕하검문소에서 검거되면서 한동안 울산구치소 신세를 지게 된다. 재판부는 그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고, 60일간의 옥살이는 그렇게 마침표를 찍는다.

“제가 갇힌 방은 조폭들만 모인 ‘폭력방’이었지요. 찌는 듯한 더위에 3.7평 좁은 감방에서 덩치 큰 조폭 10여명과 한 방 생활을 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매일 설거지하고, 그릇 씻고, 뺑기통(=변기의 속어) 치우고…, 그게 제가 하는 일이었답니다.” (당시 구치소에는 죄목에 따라 ‘마약방’, ‘교통방’, ‘잡범방’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울산시의회 산업건설위원회 의원들이 동구 도시재생 활성화사업 대상지 현장을 방문하고 있다. 사진제공=울산시의회
울산시의회 산업건설위원회 의원들이 동구 도시재생 활성화사업 대상지 현장을 방문하고 있다. 사진제공=울산시의회

 

“정당 간판이 당락 좌우하는 정치현실”

1987년을 고비로 노동운동은 숨고르기에 들어간다. 그 이듬해 10월 현대차 울산공장 변속기3부로 복직한 박 의장은 시선을 점차 정치 쪽으로 돌리기 시작한다. 2000년 현대차노조 노동대학원 1기를 수료하고 민주노동당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한 것이 정당생활의 시작. 그런 와중에도 2005년 12월에는 제12대 현대차노조 박유기 집행부의 대외협력부장을 맡아 바깥세상에 대한 안목도 키워 나갔다.

수확을 거둔 것은 2006년 5월, 민주노동당 간판으로 제4대 지방선거에 도전한 끝에 북구의회의원 배지를 흐뭇하게 거머쥐게 된 것. 그러나 정치판과 인식의 변화는 그의 당적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2008년 소속정당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 갈라지는 시점, 진보신당으로 말을 갈아탄 것. 하지만 2010년 10월 구의원 선거에서는 득표율 16.9%라는 초라한 성적표로 고배를 들고 만다. “이때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당락을 정당 간판이 좌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2년 후인 2012년 또 한번의 변화와 맞닥뜨려야 했다. 진보신당 소속이면서도 당이 다른 문재인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박근혜 후보를 당선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한 소신발언이었는데, 그만 해당행위가 되고 만 겁니다.”

이후 그는 새정치민주연합 간판으로 북구의원선거에 출마, 2위 낙선을 했지만(2014.5) 4년 후 2018년 5월엔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시의원선거에 도전, 당선의 영예를 기어이 안고 만다.

시의원이 된 박 의장이 무엇보다 의욕적으로 추진한 것은 ‘조례연구회’란 의원연구단체를 만드는 것. “사실 보수정당이 20년간이나 안방 차지를 하면서 해놓은 게 무엇이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례부터 바꾸자. 그래서 북구의원 시절의 경험도 살리고 해서 만들어 서휘웅 의원을 대표로 추대한 것이 조례연구회인데, 아직도 뿌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미래통합당에도 호흡 맞는 분 있어”

민주당 의원단의 합의추대로 후반기 의장직을 떠맡게 된 박병석 의장은 욕심 내고 싶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중의 하나가 양당(더불어민주당+미래통합당) 원내대표제를 신설하는 것. 그러자면 먼저 의회운영규칙부터 바꾸는 일이 기다리고 있다.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공식 의회운영 일정도 원내대표단이 합의해서 정하고 의원전체 연수도 원내대표끼리 합의해서 추진할 수 있다고 봅니다. 마침 미래통합당에도 이 문제로 호흡이 맞는 분이 있고요. 다른 시도의회 대부분이 활용하는 제도를 우리만 묵혀둘 이유가 없잖습니까. 하긴 그동안 상대 당이 독주하던 체제 하에서는 원내대표제 자체가 무의미했을지도 모르지만.”

제7대 울산광역시의회 후반기가 시작되는 7월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의원연수회는 꼭 가질 계획이다. 여야 의원 모두는 물론 출입기자단도 동반할 생각이다. 소통과 화합의 물꼬를 트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인 이영안 여사와는 방통대 캠퍼스커플

넌지시 별명을 물었다. “독하다고 ‘독사’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2014년 시의원선거 때는 제가 명함하고 선거공보물에 ‘깐돌이 시의원’이라고 적는 바람에 ‘깐돌이’란 별명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하하.”

취미는 탁구와 자전거 타기, 그리고 등산. 전국 명산치고 안 가본 산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시의원이 된 뒤로는 취미는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주량은 ‘소주 2병’ 정도.

울산 서생이 고향인 부인 이영안 여사(48)와는 방송통신대 활동을 하다가 만났다. “저는 그때 풍물동아리연합회를 이끌고 있었고 집사람은 유아교육학과 대표를 맡고 있었지요. 저도 참석자격이 있어서 총학생회에서 자주 만난 것이 캠퍼스 커플 탄생의 배경이 된 셈이지요.” 이 여사와의 사이에 두 딸을 두고 있다. 장녀는 지난해부터 삼성서울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고 차녀는 현재 양산 동원과기대에서 보건행정학을 전공하고 있다.

글=김정주 논설실장·사진=최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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