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찐자’
‘확찐자’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5.10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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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듣던 말 가운데 ‘아나 살찐아’라는 재미난 말이 있다. 여기서 ‘살찐이’는 고양이의 경상도 사투리이고, ‘아나 살찐아’는 잘 먹어서 통통하게 살이 찐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려고 부를 때 쓰던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의 대상이 사람으로 바뀌면 의미도 분위기도 달라지고 만다. ‘분수에 맞지 않은 요구나 희망을 비웃을 때 내는 말’로 변하는 것이다.

‘찌다’의 사전적 의미에는 ‘몸에 올라서 뚱뚱해지다’란 뜻도 들어있다. 해방 후 ‘보릿고개’ 시절, 남정네의 뚱뚱한 배는 ‘똥배’가 아닌 ‘사장배’라 해서 부(富)의 상징이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맛있고 기름진 음식을 포식한 덕분에 생긴 돈배[錢腹]로 인식된 탓이다. 하지만 요즘의 평가기준은 사뭇 다르다. 운동부족에 기인한 복부비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여하간 비만(肥滿, obesity)이란 단어가 부정적으로 비쳐지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코로나19 사태가 낳은 유행어 가운데 하나는 ‘확진자(確診者)’다. 말 그대로 ‘질환의 종류나 상태를 확실하게 진단받은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군살이 붙으면 졸지에 약 올리는 말, 모욕하는 말로 둔갑하고 만다. ‘확찐자’라는 신조어(新造語)가 그렇다. 정의하기 좋아하는 언론 종사자들은 이 낱말을 코로나19 사태로 집에 있는 시간이 늘면서 ‘살이 확 찐 사람’이라고 의미를 갖다 붙인다. 이쯤 되면 ‘집콕 사태’ 그 이전부터, 소위 ‘먹방’에 탐닉한 후유증으로, 살이 쪄서 비만인 사람조차 ‘확찐자’ 소리를 도매금으로 들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신조어가 여성을 표적으로 삼을 때 심각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충북 청주시청에서 일어났다. 다음은 충북일보의 5월 6일자 기사다. “청주시가 지난달 24일 성희롱고충심의위원회를 열어 부하 직원에게 ‘확찐자’라며 외모 비하 성격의 발언을 한 청주시청 팀장급 공무원 A씨(6급)에 대해 ‘성희롱’ 판단을 내렸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3월 18일 오후 시장 비서실에서 일어났고, 계약직 여직원 B씨가 “모욕을 당했다”며 직접 고소함으로써 밖으로 알려지게 됐다. B씨는 고소장에서 “평소 친분이 전혀 없는 A씨가 여러 직원 앞에서 손가락으로 신체 부위를 찌르며 ‘확찐자가 여기 있네’ 라고 모욕을 줬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흥미로운 것은 경찰의 판단이다. 청주상당경찰서 관계자는 “‘확찐자’라는 표현이 사회통념상 경멸적 표현이라고 보기 어려워 모욕 혐의가 없다고 판단했다”며 이 사건을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넘겼다고 밝혔다. 그러나 검찰이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상태.

이 사건이 잠시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자 이번에는 그 틈새를 파고든 상혼(商魂)들이 있어 관심을 모은다. ‘체형연구소장’이란 분은 지난 5일 자신의 인터넷카페에 ‘확찐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급(急) 다이어트 방법’을 소개했다. 그중에는 이런 조언도 있었다. “식탁에 냄비를 통째로 가져다놓고 음식을 먹지 마라.” “냉장고에 ‘할 수 있다’ 또는 ‘작년에 산 옷을 기억해라’라는 등 동기부여가 되는 문장을 적어서 붙여놓도록 하자.”

어찌됐건, 지나친 비만은 코로나19 극복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모양이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공중보건대학원 교수인 바리 팝킨 박사는 “과체중이나 비만은 코로나19에 대항하는 면역력을 감소시킨다”고 했다. 또 지난해 미국의 한 연구팀은 “과체중인 사람에게는 백신 효과도 떨어진다”고 했다. ‘확찐자’의 설움을 곱씹게 하는 이 조언들이 코로나19 사태의 종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여전히 미지수의 영역에 속한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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