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길의 드라마에세이]나의 아저씨 - 어떤 사랑이야기
[이상길의 드라마에세이]나의 아저씨 - 어떤 사랑이야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3.26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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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한 장면.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한 장면.

 

<나의 아저씨>에서 같이 술을 한잔 하면서 지안(이지은)이 동훈(이선균)에게 묻는다. “그 때 나 왜 뽑았어요?” 동훈은 건설회사 구조기술사이고, 지안은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계약직 아르바이트였다. 수많은 지원자 중 지안을 뽑자고 한 건 안전진단팀 팀장인 동훈이었다. 아무튼 지안의 질문에 동훈은 이렇게 대답한다. “달리기, 왠지 내력이 세 보여서.” 지안은 이력서에 ‘달리기’를 특기로 적어 냈었다.

며칠 뒤 같은 동네 사는 지안과 함께 퇴근을 하면서 동훈은 왜 지안의 내력이 세 보였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게 된다. 그는 구조기술사가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르는 지안에게 이렇게 말한다. “구조기술사는 말 그대로 구조를 짜는 사람. 모든 건물은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야. 바람, 하중, 진동. 있을 수 있는 모든 외력을 계산하고 따져서 그 보다 세게 내력을 설계하는 거야. 항상 외력보다 내력이 세게. 인생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세면 버티는 거야.”

그 말에 지안은 다시 “나보고 내력이 세 보인다면서요?”라고 묻고, 그 질문에 동훈은 이렇게 설명한다. “내 친구 중에 정말 똑똑한 놈이 하나 있었는데, 이 동네에서 정말 큰 인물 하나 나오겠다 싶었는데. 근데 그놈이 대학 졸업하고 얼마 안 있다가 뜬금없이 머리 깎고 절로 들어가 버렸어. 그 때 걔 부모님도 앓아누우시고, 정말 동네 전체가 충격이었는데. 걔가 떠나면서 한 말이 있어. 아무것도 갖지 않은 인간이 돼보겠다고. 다들 평생을 뭘 가져보겠다고 고생고생하면서 ‘나는 어떤 인간이다’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아등바등 사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면 내가 뭘 갖는 건지도 모르겠고, 원하는 걸 갖는다고 해도 나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 못 견디고, 무너지고. 나를 지탱하는 기둥인 줄 알았던 것들이 사실은 내 진정한 내력이 아닌 것 같고. 무의식중에 나도 그놈 말에 동의하고 있었나 봐. 그래서 이런저런 스펙 줄줄이 나열돼 있는 이력서보다 달리기 하나 달랑 써있는 이력서가 훨씬 세 보였나 보지.”

사실 지안은 살인자다. 고작 여섯 살에 병든 할머니와 단 둘이 남겨진 지안은 부모가 남긴 사채 빚 탓에 꿈이나 계획, 희망 같은 단어는 쓰레기통에 갖다 버린 지 오래 됐다. 어려서부터 각종 아르바이트 등을 통해 버는 족족 빚을 갚아 나갔던 어느 날, 사채업자가 돈 갚으라며 병든 할머니를 마구 때리자 이성을 잃고 사채업자를 칼로 찌르게 됐다.

다행히 그 때가 아직 미성년자인데다 정상참작이 돼 호적에 빨간 줄이 그어지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사채업자의 아들놈(장기용)이 달라붙어 더 악랄하게 돈을 뜯어내고 있다.

이제 스물 한 살인 지안은 돈을 벌기 위해 동훈이 다니는 건설회사에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하게 됐고, 사채업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동훈을 회사에서 쫓아내려는 대표이사 준영(김영민)을 도와 한 몫 챙기려 한다.

동훈의 대학 후배인 준영은 지금 동훈의 와이프인 윤희(이지아)와 몰래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준영의 지시로 도청을 통해 동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지안은 그의 인간적인 매력에 점점 끌리게 된다. 무엇보다 월 500만원을 버는 사람의 표정이 자신처럼 어두운 게 신기하고 연민이 느껴졌다.

그건 동훈도 마찬가지. 이제 겨우 스물 하나인데 자신보다 더 경직되고 인생을 다 산 듯한 지안의 모습이 안타까워 지켜주고 싶어 한다. 고달픈 삶에서 그렇게 둘은 서로에게 위로가 돼줬다. 허나 사랑은 아니었다. 그냥 지안에게 동훈은 ‘나의 아저씨’가, 동훈에게 지안은 ‘우리 지안이’가 되어 갔다. 도청이 들킨 뒤에도 잠적해버린 지안이 오히려 걱정됐던 동훈은 다시 마주한 지안에게 이렇게 말한다. “거지같은 내 인생 다 듣고도 내 편 들어줘서 고마워.” 그 말에 지안은 울먹이며 말한다. “아저씨가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위로도 사랑의 한 단면, 동훈이나 지안이나 적어도 서로를 좋아한 것만은 분명하다. 또 지금껏 갖기 위해, 그러니까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았던 동훈이었을지 모르지만 지안만큼은 고달픈 삶을 공유하며 오롯이 그녀의 행복을 바랬던 거다. 그건 지안도 마찬가지였다.

내력이 외력보다 세면 버티게 된다는 인생의 법칙은 사실 사랑만큼은 예외가 아닐까. 사랑은 내력이 아무리 세도 상대방의 눈빛 하나에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다. 지안만큼 ‘인생의 내력’이 셌던 동훈도 믿었던 아내 윤희의 외도사실을 알게 되면서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해서 서로 선을 넘었어도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건 ‘사랑의 내력’이 셌기 때문.

그건 지안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들의 내력이 셌던 건 동훈이나 지안이나 그저 서로의 행복을 바랬을 뿐, 가지려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아까 한 말 취소다. 어쩌면 ‘진짜 사랑’이었을지도.

2018년 5월 17일 방영종료. 16부작.

취재1부 이상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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