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 - 전쟁이라는 ‘지옥의 시(詩)’를 쓰다
1917 - 전쟁이라는 ‘지옥의 시(詩)’를 쓰다
  • 이상길 기자
  • 승인 2020.02.27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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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로 뒤덮인 글입니다.>

지옥의 시작은 명령이었다. 전투로 지쳐 고목에 잠깐 기댄 병사의 고단한 몸은 이내 꿈속으로 빠져들지만 꿈이 현실인지, 아니면 현실이 꿈인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그 때였다. 상관에 의해 관등성명이 불러지고 선잠에서 깬 병사는 어리둥절한 몸을 이끌고 전우와 함께 명령을 받기 위해 사령부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들이 예상했던 건 부식 전달 명령 정도? 그래서 병사는 소대에서 가장 친한 전우를 선택해 사령부로 동행하게 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참호 속을 걷는 그들의 발걸음은 나름 가벼웠다. 하지만 뜻밖에도 천막 속 사령부에서는 장군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가 내린 명령은 지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었다. 바로 병사의 형이 있는 대대로 가서 철수 중인 적을 공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전달하는 것. 이유는 적이 파놓은 함정일 수 있다는 것이다.

철수하면서 적들이 통신선을 모두 끊어놓은 탓에 직접 가서 전달해야만 했고, 그러지 못하면 무려 1천600여명이나 되는 대대 전체가 몰살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적들이 실제로 철수했는지 분명하지도 않은 반대편 참호를 통과한 뒤 마을과 강을 건너야만 했다. 그 거리가 대략 15km. 1천600여명의 대대원 속에 친형이 있는 병사야 그렇다 쳐도 따라 나온 전우는 무슨 죄일까. 인생은 그렇게 한 치 앞도 알 수 없고, 죽음은 그림자처럼 늘 곁에 붙어 다닌다. 때는 바야흐로 1차 세계대전이 한 창이던 1917년 4월6일이었다.

명령이 지옥의 시작이라면 이제부터 그들 앞에 놓인 풍경은 완벽한 지옥도(地獄圖)였다. 방어를 위해 쳐놓은 철조망은 지옥의 화염을 연상케 했고,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철조망에 꽂혀 죽은 병사는 꼬챙이가 된 채 뜨거운 불길에 여전히 고통 받고 있는 듯 했다. 또 진흙 속에 박힌 병사의 썩은 시체는 연신 고통스런 비명을 질러대는듯 했다.

말과 병사의 시체가 나뒹구는 진흙탕 위로 신이 나 축제를 벌이는 검은 파리떼들. 그들은 아기 악마들이 틀림없었고, 잠시 후 두 병사가 도착한 적의 참호 속은 염라대왕을 만나러 가는 통로였다.

또 그 길목에서 마주친 거대하다 못해 괴물 같은 모습의 검은 쥐는 차라리 지옥의 사자였다. 다행히도 두 병사는 염라대왕으로부터 환생을 명받게 되고, 겨우 목숨을 부지한 둘은 들판에서 잠시나마 한 숨을 돌린다. 초록이 이토록 아름다울 줄이야.

허나 그것도 잠시, 잠자리들이 술래잡기를 하듯 뒤엉켜 있는 하늘 위에서 날갯죽지가 꺾인 사탄이 추락한다. 하필이면 두 병사가 쉬고 있는 곳으로. 이내 루시퍼의 모습을 한 적 병사가 비행기 안에서 튀어나와 삼지창 같은 단검으로 전우를 가차 없이 찔러댄다.

비록 적이지만 둘은 불타는 전투기에서 그를 살려주려 했던 것뿐인데. 뭐. 어차피 이곳은 지옥이니 이해는 된다. 살려보려 애를 쓰는 전우의 품안에서 병사는 창백하게 식어갔고, 홀로 남은 병사는 슬픔을 등에 지고 다시 임무 수행에 나선다.

마침내 마을에 도착한 병사. 전쟁통에 집들은 성한 곳 없이 모조리 허물어져 스산하기 그지없었다. 인적이라곤 드문 그곳에도 악마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잠복해 있던 적의 총탄에 스친 병사는 순간 정신을 잃고 만다. 얼마나 지났을까? 애초에 시간과 싸우고 있었기에 정작 애가 타는 건 나였다. 깜깜해지고 난 뒤에 깨어난 병사, 문틈 사이에선 밝은 빛이 천국처럼 들어오고 있었다. 허나 나가보니 그건 화염이었고, 다시 지옥문을 연 병사는 살기 위해 내달렸다. 아니 살리기 위해 내달렸다. 원래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두운 법. 온통 어둡기만 했던 주위가 서서히 밝아올 무렵, 병사는 강에 뛰어들었다. 건더기처럼 쌓여 있는 퉁퉁 부은 시체들은 지옥의 마지막 관문을 알렸고, 그들을 헤치고 당도한 강 건너편에서는 천사의 노래가 들렸다.

대대원 중 한 명이 휴식 중에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 하지만 노래가 끝날 새도 없이 병사는 지휘관을 찾기 위해 다시 참호 속으로 뛰어든다. 이제 막 공격을 시작하는 순간, 그는 속도를 내기 위해 적의 총탄이 쏟아지는 참호 밖으로 튀어나가 수평으로 내달린다.

진격을 위해 수직으로 달려 나가는 아군들에게 그것은 마치 평화의 퍼포먼스 같았다. 마침내 병사가 임무를 완수하면서 지옥의 시(詩)는 끝을 맺는다. 그리고 그 시는 수미상관(首尾相關:시에서 첫 번째 연이나 행을 마지막 연이나 행에 다시 반복하는 것)이었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한숨을 돌리기 위해 고목에 기댄 병사, 그렇게 지옥 속에서도 삶은 고목처럼 굳건히 버텼고, 기댈 어깨를 내어 준 고목은 병사에게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고생했다.”

2020년 2월 19일 개봉. 러닝타임 119분.

취재1부 이상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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