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형 칼럼] 효(孝)
[이노형 칼럼] 효(孝)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2.27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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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효자의 지극한 효성을 하늘이 알아주어 엄동설한 속 싱싱한 잉어나 향긋한 죽순을 구해 마침내 부모의 병을 고칠 수 있었단다. 삼강행실도 등의 숱한 효행 담론들은 자신의 생살이나 핏물로써 병든 부모를 살려내는 행위를 효의 본보기로 가르치곤 했다. 구비전승 중에는 아들 며느리의 손을 빌어 펄펄 끓는 가마솥에 어린 손자를 삶아 복용한 끝에 할애비가 중병에서 거뜬해졌다는 줄거리도 전한다. 다 봉건 유교의 교조나 엽기의 효(孝) 담론들이다. 성대한 장례의식이나 시묘살이, 제사 등의 상제례로 표현되는 이른바 사효(死孝)도 그런 맥락의 효다. 여기 부모나 조상의 권위는 절대적이고 신비한 효의 전제가 된다.

전혀 엉뚱한 부모관과 효도 있다.
‘잡은꿩털 다뜯어서/ 숯불피워 구어다가/ 논아주며 하는말이/ 날개날개 덮던날개/ 시아버님 잡수시고/ 입술입술 놀리던입술/ 시어머니 잡수시고/ 요뉘구년 저뉘구녕/ 휘두르던 뉘구녕은/ 시할머님 잡수시고’.

고부갈등의 일반적 당사자일 며느리의 풍자이기는 해도 억압적 부모는 이제 망신살이를 당할 정도로 절대적 지위에서 내려와야 하는 상대적인 존재가 된다. 무조건 순종, 복종해야하는 희생적 효의 가능성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전통적으로 한결 일반적일 효의 본질이나 방식은 기적이나 신비, 또는 가부장적 절대자를 향한 데에 있지는 않다. 본래 그것은 일상적인 생활 차원에서 가능한 보편성의 효이고, 더불어 운명을 개척해나가야 할 가족공동체 속 평등한 구성원 차원에서 구현되는 생활적이고 상대적인 가정윤리일 수 있다.

‘뽕따다가 누에처서/ 세실중실 뽑아낼제/ 세실을랑/ 가려내여/ 부모의복 장만하고/ 중실을랑 골라내여/ 우리몸에 입어보세/ 뒷터에는 목화심어/ 송이송이 따낼적에/ 좋은송이 따로모아/ 부모의복 장만하고/ 서리맞이 마구따서/ 우리옷에 두어입세’.
여기 부모의 옷감을 정성껏 마련해가는 과정에 깃든 효심과 효행은 생활 현장 어느 자식에게나 가능할 일이다. 부모의 지위란 것도 자식의 몸과 생명을 해코지하면서까지 효를 강요하는 가부장적 절대자의 지위가 아니다. 그것은 일상적 효행만으로도 족할 자연스럽고도 상대적인 지위다. 이런 효는 일상의 소박한 효이지만 봉건의 그것에 견주어 오히려 진솔하고 감동적인 치사랑일 수 있다. 생활 현장의 절대다수가 생각하고 실천해온 가정윤리는 그런 것이다.

핏줄로 이루어지는 가정은 사회를 이루는 기초단위이기도 하다. 그것은 가정이 흔들리면 해당 사회가 흔들리고 사회가 흔들리면 해당 가정들도 흔들리게 되는 까닭이다. 오늘날 노인문제가 국책의 하나가 되어야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효는 가정의 유지와 발전을 담보해줄 필수적 가정윤리다. 우리 역사가 유구한 것이라면 그것은 상당 부분 건강한 가정을 담보해온 가정윤리에 빚진 것일 수도 있다. 군주를 만백성의 어버이로 포장하듯이 유교적 효 담론 속에는 억압적인 지배이념이 들어있다. 동시에 고유한 치사랑의 진정성이 들어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땅의 효는 범계층적인 보편성을 지닌 윤리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노인문제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중요한 사회문제다. 가난, 질병, 고독 등을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삼고(三苦), 사고(四苦)의 노인문제가 그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경제적 접근은 OECD 평균 몇 배나 되는 가난의 문제는 물론이거니와 나머지 노인문제도 상당 부분 완화해줄 선차적 처방일 수 있다. 경노효친 윤리의식의 쇠퇴 현상도 노인들의 경제생활 개선 과정에서 쉬 개선되리라 본다. 더구나 우리는 효행의 갸륵한 터전에서 오래 동안 살아온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노형 고래문화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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