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제의 자연산책] 화중왕(花中王)
[조상제의 자연산책] 화중왕(花中王)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2.24 21: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안의 봄 거리. 수레와 말들로 왁자지껄한 시장통. 사람들이 줄지어 모란(牡丹)을 사러간다. <중략> 한 늙은이, 우연히 꽃 시장에 왔다가 탄식하기를 “한 떨기 꽃값이 열 집의 세금과 맞먹는구나!”

1천200년 전 당나라 장안의 꽃시장 풍경입니다. 모란의 화품(花品)에 장안 사람들이 얼마나 열광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 당시 가구당 세금은 얼마나 냈는지는 몰라도 오늘날과 비교하면 모란 한 떨기의 값은 상당했을 것입니다. 열 집의 세금이면 몇 십 만원은 되지 않았을까요?

화중왕(花中王). 화왕(花王) 여러분은 꽃 중에 무슨 꽃이 왕이라고 생각하세요? 장미와 모란 중 어느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다른 꽃이라도. 서양에서 화왕이 장미라면 동양에선 화왕은 분명 모란입니다. ‘모단’(牡:수컷 모, 丹:붉을 단)은 한자어이고 우리 국명(정명)은 ‘모란’이라 하고 글자가 비슷한 ‘목단’(牧丹)으로도 많이 불립니다. 하도 꽃이 부(富)티가 나 부귀화(富貴花)라고도 하죠.

모란(牡丹 : Paeonia suffruticosa). 천향(天香)과 국색(國色)을 갖춘 아름답고 농염(濃艶)한 꽃. 한껏 무르익어 관능적인 꽃. 수양제가 완상(玩賞)하고 당 현종이 침향정(沈香亭) 앞에 심으니 술 취한 이태백이 양귀비와 비유하였으니. 가히 모란은 천년을 훨씬 뛰어넘는 세월을 왕실과 귀족의 애호를 받으면서 화왕(花王)의 자리를 누렸습니다. 풍만함과 호사스러움의 극치. 그 매력에 가는 대부분의 학교마다 풍요와 평화를 기원하며 모란을 심었습니다.

그럼 중국이 원산지인 모란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언제일까요? 그 기록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좀 더 자세한 기록을 남긴 삼국유사에는 당태종(이세민 598~649)이 신라 26대 진평왕(재위 579~632) 632년에 홍색, 자주색, 흰색의 모란도(牡丹圖) 3점과 그 씨 3되를 보내왔습니다. 진평왕에게는 평소에 그가 총애하는 딸 덕만 공주가 있었습니다. 덕만 공주는 당에서 보내온 모란도를 보고 ‘이 꽃은 매우 아름답지만 그림 속에 나비와 벌이 없으니 반드시 향기가 없는 꽃일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당나라 사신마저 공주의 명민(明敏)함에 놀랐습니다. 실제로 씨를 심었더니 꽃에 향기가 없었다고 합니다. 영민한 이 덕만 공주가 바로 그해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으로 왕위에 오릅니다.

당태종은 왜 왕위에 오를 덕만에게 향기가 나지 않는 모란을 보냈을까요? 선덕은 당태종이 혼자 사는 자기를 놀린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모란의 모든 종이 향기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원예종 모란의 대부분은 향기가 있습니다. 강렬하지도, 달콤하지도 않은 은은한 향기, 남성을 유혹하는 여인의 향기가 있습니다.

화왕 모란이 봄이 되자 어여쁘게 피어나서 모든 꽃들을 능가하며 홀로 빼어났다. 이에 온갖 싱그러운 꽃들이 분주히 와서 화왕을 조회하였다. 그 중에 장미라는 요염한 가인(佳人)이 아양을 부리며 “첩이 일찍이 왕의 아름다운 덕을 듣고 흠모하는 마음으로 찾아왔사오니 하룻밤 잠자리로 모시겠습니다.” 하였다. 또 베옷 입은 빈한(貧寒)한 선비로 길가에 살던 백두옹이 찾아와 간언하기를 “예로부터 임금이 요염(妖艶)한 여인을 가까이 하면 충직한 신하를 잃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그 유명한 설총의 화왕계(花王誡) 일부분입니다. 신라가 삼국통일(676)을 하고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되자 통일 이후 왕위에 오른 31대 신문왕은 후궁들을 불러 놀기를 즐겼다고 합니다. 이에 설총은 화왕의 이야기로 왕에게 풍간(諷諫)을 한 것이지요. 실제로 신문왕은 화왕의 이야기를 듣고 국정에 온 힘을 쏟아 통일신라 전성기의 기반을 마련합니다. 설총이 대한한 사람인 거죠.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그토록 화려하고 우아한 화왕 모란도 열흘을 넘지 못하고 꽃잎을 떨구니, 부귀도 영화도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 그래도 나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봄을. 작년에 심은 모란꽃을.

조상제 범서초등학교장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