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하늘에 묻는다 - 과학기술, 백성을 품다
천문:하늘에 묻는다 - 과학기술, 백성을 품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1.02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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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천문'의 한 장면.
영화 '천문'의 한 장면.

 

세상을 바꾸는 건 정치나 법보다는 언제나 과학기술이다. 그게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정치나 법이란 게 대체로 안 좋은 일이 터지고 난 후 뒤늦게 그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많지만 과학기술은 기술적으로 그 안 좋은 일이 아예 일어나지 않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정치를 통해 아무리 법을 강화해도 결국 범죄를 줄이는 건 CCTV다. 또 스티브 잡스에 의해 스마트폰이 개발돼 대중화되면서 지구촌은 이제 실시간으로 하나가 됐다. 그 결과 70억 인류 각자가 다 부당한 권력에 대한 감시자가 됐다. 만약 1980년에도 스마트폰이 대중화돼 있었다면 그해 5월 광주에서 발생했던 비극은 아예 일어나지 않았거나 일어났어도 진실을 알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을 테다. 물론 과학기술의 발달도 부작용을 초래할 순 있겠지만 세상을 바꾸는데 있어 과학기술이 정치나 법보다 월등한 힘을 갖고 있다는 건 분명하지 않을까.

관건은 지도자의 성향이지 않을까 싶다. 비록 과학기술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고 해도 과학기술에 대한 지원은 정치나 법이 결정하는 일이고 그 정점에는 언제나 최고 권력자인 지도자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늘상 정치놀음이나 하며 권력유지에만 힘쓰면서 과학기술 발전에는 소홀한 사람이라면 세상의 변화는 더딜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를 불문하고 역사의 흐름은 늘 명분 중심의 공리공론(空理空論)에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중시하는 실학(實學)으로 발전돼 왔다. 실제로 중국도 그랬고, 우리도 그랬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조선 전기 최고의 성군(聖君)이었던 ‘세종’과 지금으로 치면 과학자였던 ‘장영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허진호 감독의 <천문:하늘에 묻는다>는 이런 관점에서 봐야 영화가 좀 더 제대로 눈에 들어오게 된다.

조선에서 실학이 태동한 건 17세기가 되어서였고 아직 명분이 대단히 중요시됐던 15세기에 세종(한석규)과 장영실(최민식)의 브로맨스(남자들끼리 갖는 매우 두텁고 친밀한 관계)는 영화 속에서 시종일관 빛을 뿜어내는 별빛마냥 반짝반짝 빛이 난다.

비록 관노로 태어났지만 천재 과학자였던 장영실을 왕인 세종은 대단히 아꼈다. 실제로 장영실은 시계가 보급될 수 없었던 그 시절,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인 ‘자격루’를 최초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시간을 알려줄 수 있게 했다. 또 사대주의에 젖어 한반도와 맞지 않는 중국 명나라의 절기를 그대로 따라 쓰다 보니 백성들이 농사를 짓는데 애를 먹자 천문기구 제작을 통해 우리 땅에 맞는 절기를 찾아냈다. 모두 세종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그 마음은 곧 애민(愛民: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 중국 명나라는 속국인 조선이 천문기구를 제작해 감히 하늘의 이치를 탐구한다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조선을 찾은 명나라 사신은 조선이 독자적으로 제작한 천문기구는 불태워버리길 명하고, 장영실은 압송하려 한다. 어이없는 건 그런 명나라의 태도에 사대주의에 젖은 상당수의 대신들은 동조를 한다는 점. 공을 인정해 장영실에게 종 5품의 벼슬을 내리려 하는 세종을 향해 “근본 없는 노비에게 그런 후사를 하게 되면 나라의 기강이 흔들리게 된다”며 반기를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그들에게 세종은 이렇게 말한다.

“과인은 재주 있는 자에게 관직을 내려 이 나라를 이롭게 하려는 것이요. 도대체 당신들이 꿈꾸는 정치란 게 뭐요? 그저 백성들 위에 군림하면서 권세나 누리려는 거 아니오!”

자고로 지도자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절대적인 덕목이란 바로 측은지심(惻隱之心:남을 불쌍하게 여기는 타고난 착한 마음을 이르는 말)이 아닐까 싶다. 왜냐? 힘을 가졌으니까. 타인 위에 군림하는 권력이란 근본적으로 악한 존재고 그런 권력의 횡포를 막고 권력을 권리가 아닌 의무로 전환시키는 건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지도자의 마음 말고 딱히 뭐가 있을까. 또 세종의 그런 측은지심이 그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만들지 않았겠는가. <천문:하늘에 묻는다>에도 나오지만 세종이 지닌 측은지심의 끝판왕은 역시나 ‘한글창제’다. 이 타이밍에 훈민정음 서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자.

아마 다르게 읽힐 것이다.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아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마다 쓰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2019년 12월 26일 개봉. 러닝타임 132분.

취재1부 이상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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