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증인들이 전한 울산의 이발문화 ‘생생’
산증인들이 전한 울산의 이발문화 ‘생생’
  • 김보은
  • 승인 2020.01.0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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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화원연합회 향토사 연구지 제7호서 조명… 구군별 이용업소 현황·도구 변천 등도 실려
청수이용원 내부.
청수이용원 내부.
1969년 농소농협 이발소 모습.
1969년 농소농협 이발소 모습.

 

“열여섯 살 때였어요. 1955년 무렵일 겁니다. 당시 거리에서 얼음과자를 팔고 다니던 친구의 주선으로 조일이용원이란 곳을 소개받고 이발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이곳이 울산 최초의 이용원인데, 지금의 중구 시계탑사거리에 있는 경남은행 자리가 있지요? 그곳이었습니다.”

울산시 중구 우정동에 거주하는 80세 이말도씨는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돼 힘들고 고달프던 그 시절부터 줄곧 울산 이발업계에서 활동했다. 조일이용원에서 2년, 영두이발관에서 5년 간 일하다 양사초등학교 뒤에 양사이용원을 차려 30여년간 운영하며 두 아들과 딸을 모두 결혼까지 시켰다.

울산시문화원연합회에서 펴낸 울산 향토사 통합연구지 제7호 울산지역문화연구는 이같이 울산 이발업계 산증인들의 목소리를 통해 울산의 이발문화를 조명했다.

최명훈 중구문화원 이사, 송철호 남구문화원 향토사연구원 소장, 장세동 동구문화원 지역사연구소장, 박중훈 북구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등이 참여해 구·군별로 이발문화에 대해 집필했다.

‘이용사’란 산업인력공단에서 시행하는 이용사 시험에 합격해 그 자격을 취득한 자를 가리킨다. 그러나 오늘날 ‘이용’은 단순히 기술이나 자격의 취득이 아니라 사회, 문화적 욕구·욕망과 연결돼 있다.

이용업은 대체로 1980년대 들어 장발 문화의 성행과 퇴폐업소의 번성으로 인해 고객을 미용업에게 빼앗기면서 성장이 위축돼 전국적으로 이용업소 수가 줄었다. 그러나 연구지에선 울산만은 이 시기에 줄지 않고 꾸준히 늘어났다고 짚고 있다.

“1980년대 그때는 이용업이 참 잘 될 때였습니다. 울산이 부산 등 대도시보다는 전반적으로 수준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이발 기술 하나면 먹고 살기에 충분했습니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올림피아호텔에서 오랫동안 이용업을 했던 배정갑씨).”

이발소 개점에는 이발기술사가 필수적이다. 책에선 과거 이발사들이 허드렛일부터 시작해 도제식 교육을 통해 기술을 배우고 이발소를 개점하던 시절을 언급했다. 현재 이용학원을 다니며 기술을 배우고 면허를 취득하는 것과는 다른 풍경이다.

“남의 집에서 한 4~5년 일을 해야 합니다. 이발사에 따라서 잘 가르쳐 주는 분도 있고, 일은 안 가르치고 일만 시키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상황에 따라 차이는 있지요. 나는 나이가 들었으니 잘 배우게 된 거지요(방어동 소재 대성이용원 장덕구 전 이용사).”

이외에도 연구지에는 구군별 이용업소 현황, 이용도구의 변천, 사진자료 등 울산의 이발문화와 관련된 다양한 자료와 기획특집 ‘무궁화박사-심경구’, 김진곤 울산향토사도서관장의 ‘최초의 울주군 상북면지, 「헌남」(1975)의 고찰’, 엄형섭 울산문헌연구소장의 ‘「학음산고」 속 울산 이야기’ 등 일반논단이 함께 실렸다. 김보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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