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手帖)
수첩(手帖)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12.29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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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手’자가 들어가는 ‘수첩(手帖)’의 사전 뜻은 ‘몸에 지니고 다니며 간단한 기록을 할 수 있게 만든 조그마한 공책’이다. 영어로는 notebook,pocketbook, reminder book이라는 표현이 있다. 그렇다고 우리말이 수적으로 모자란 것도 아니고, 오히려 더 다양하다. 비슷한 우리말에 잡책(雜冊=여러 가지를 적는 공책), 잡기장(雜記帳), 잡기책(雜記冊)이 있고 두 나라 말이 섞인 ‘메모장(memo帳)’도 있다.

‘수첩’ 하면 떠오르는 저명인사가 있다. 울산 출신 이채익 국회의원이 그 주인공. 이 의원은 경남도의원 시절부터 수첩 하나로 많은 화제를 뿌렸다. 어른 손바닥보다 작고 깨알 같은 글씨가 빼곡히 들이찬 그의 수첩을 혹자는 ‘배추쟁이 문서’로 부르기를 즐겼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도 값싸게 구할 수 있는 초록색 줄 표지의 이 수첩을 이 의원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사용하는 습관이 몸에 익었다. ‘배추쟁이 문서’ 속에는 그의 꼼꼼함과 성실성이 그대로 묻어있다.

그러나 필자는 고만한 크기의 수첩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많은 양의 기록을 요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취재용 수첩도 인터뷰용 수첩도 크기가 대학노트만 해야 직성이 풀린다. 급할 때는 염치불구하고 A4용지 크기의 ‘이면지’를 일부러 부탁해서 얻어 쓰기도 한다. 하지만 기록의 흔적을 뒤질 때마다 후회막급일 때가 많다. 속기(速記)를 한답시고 갈겨쓰다 보니 내가 적은 글을 내가 못 알아보는 경우가 부지기수인 탓이다.

새해를 코앞에 두고 새삼스레 수첩 얘기를 꺼내는 이유가 있다. 잘못 사용하거나 잘못 보관했다가 큰코다치는 일을 눈여겨본 적이 있고 지금도 목격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과거의 본보기가 ‘안종범 수첩’이라면 현재의 본보기는 ‘너무 친절한’이란 수식어가 따라붙는 이른바 ‘송병기 수첩’이다. ‘안종범 수첩’이 박근혜 전 대통령뿐 아니라 안종범(전 대통령실 정책조정수석) 자신까지도 ‘몹쓸 사람’으로 낙인찍게 한 자충수였다면 ‘송병기 수첩’은 그 못지않은 수의 측근인사들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판도라 상자’다.

이 수첩의 주인공 송병기 울산시 경제부시장은 며칠 전 시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검찰이 ‘업무수첩’이라고 몰아세운 데 대한 반발이었겠지만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모자란다는 뒷말이 무성했다. 여하간 ‘개인의 소회를 담은 메모지 같은 것’이라던 그의 수첩은 그렇잖아도 약점만 노리고 있던 호랑이 검찰에게 먹음직스런 먹잇감을 산 채로 안겨준 거나 뭐가 다르냐는 빈정거림을 낳기도 했다.

‘송병기 수첩’은 여러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게 될지도 모른다. 본의는 아니겠지만 ‘참고인’으로 검찰 조사에 응한 임동호 전 민주당 최고위원에게는 극도의 분노를 안겨주었고, 또 다른 측근들에게는 좌불안석(坐不安席)의 공포영화를 보여주는 꼴이 되고 있다. 만약 그런 죄목(罪目)이 있다면 그에게 ‘중요수첩 부실관리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농담이 나오는 판이다. 검찰이 압수수색의 칼날을 곧 들이대리라는 예측을 왜 그 좋은 머리로 하지 못했나 하는 비아냥거림으로 들린다. ‘약은 고양이 밤눈 어둡다’는 속담을 인용하는 호사가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세밑에 선물이랍시고 받은 수첩은 한 권. ‘이채익 수첩’과 ‘2020 다이어리’의 딱 중간 크기지만 큰맘 먹고 가까운 지인에게 선사한 것이 엊그제 일이다. 해가 바뀌어 ‘노란 돼지의 해’ 기해년(己亥年)이 ‘하얀 쥐의 해’ 경자년(庚子年)으로 문패를 갈아달기 직전이지만, 경제사정 때문인지 아직 새해 수첩 소식은 ‘찍’ 소리도 안 들린다. 그래도 덜 섭섭한 것은 ‘중요수첩 부실관리의 죄’ 만큼은 뒤집어써야할 이유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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