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이 강제한 고려인 이주열차
스탈린이 강제한 고려인 이주열차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12.26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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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어느덧 80여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고려인 강제이주 문제는 우리 민족문학사에서 여전히 미완의 과제이다. (…) 이제라도 나는 강제이주 문제를 내 문학의 화두로 삼고 당시 현실과 정황을 정성껏 복원해내고자 한다. 이 시집에 담긴 작품들은 우리 민족이 연해주와 사할린, 중앙아시아에서 겪었던 모든 고통과 시련, 그리고 그동안 가슴속에 담아만 두고 차마 꺼내지 못했던 애환을 내가 시인으로서 대신 불러내고 모셔온 것이다. 당시 강제이주열차에서 목숨을 잃은 2만여 슬픈 영혼들께 이 시집을 바친다.”

앞의 글은 시집 ≪강제이주열차≫를 쓴 ‘이동순’ 작가의 말에서 따왔다. 이 시집은 지난 8월말에 나왔는데, 출판 정보를 보자마자 사서 읽었다. 종종 TV를 통해 중앙아시아에 흩어져 살고 있는 고려인 이야기를 보면서 이들의 유랑 연유는 무엇이며, 강제이주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더 알아보고 싶었던 적이 있다. 그랬기 때문에 이 책은 나를 깊게 빨아들였고, 긴 한숨을 토해내게 했다. 시인이 이 글들을 쓰면서 가슴에서 불덩이처럼 뜨거운 무엇이 울컥 쏟아져 들어오는 놀라운 충격을 자주 겪었다고 표현한 것처럼 나 역시 그러했다.

이 책은 그냥 시집이 아니었다. 작가가 마치 직접 목격한 것을 쓴 것 같은 착각에 빠지면서 읽어나갔다. 이것은 시를 읽은 것이 아니라 피어린 이야기가 담긴 민족사를 처음으로 대한 기분이었다. 견자(見者)의 입장인 작가가 느낀 회상의 동일성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이되고 있었다. 시집을 해제한 사람은 문학평론가가 아니라 ‘반병률’이라는 역사학자이다. ‘반병률’은 ‘이동순’의 시들을 마치 실오라기 풀듯 하나하나씩 역사성을 부여하면서 풀어내었다. 옛 소련 땅에 살다간 고려인들 이야기를 나는 이 두 사람의 글을 빌려 다수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스탈린이 강제한 이주열차는 1937년 9월에 시작하여 그해 12월말에 종료되었다. 연해주 각지의 고려인들을 140여 차례로 나누어 이동시킨 것이다. 어디로 끌려가는지, 얼마나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정처 없는 이주열차였다. 실제로는 6천5백km 거리를 한 달 이상 이동했는데, 기차에서 내려 다시 중앙아시아의 산지사방으로 흩뿌린 거리와 날짜까지 합하면 이동 거리도, 걸린 일수도 훨씬 더 길 것이다. 이동과정에서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병들어 죽은 사람들이 속출했다. 최소 1만여명 이상이 희생되었는데, 시신마저도 내동댕이쳐진 생지옥의 현장을 그들은 경험했다.

제1부의 ‘강제이주열차’가 시집의 주된 글이다. 제목만으로도 그 내용을 가늠케 하니 쉰 두 편의 글 중 대강만 짚어보자. 짓밟힌 고려/ 잡초/ 혁명가/ 숙청/ 이주 통보/ 서쪽으로/ 떠나던 날/ 떠돌이 개/ 그날의 실루엣/ 눈물의 세월/ 라즈돌노예 역에서/ 우리는 짐승이었다/ 고향 흙/ 깊은 적막/ 레퀴엠/ 불쌍한 아가야/ 고향 흙/ 열차 사고/ 깔밭의 참변/ 가장 비통한 그림/ 김텔미르의 고백/ 송희연의 회고/ 시인 연성용의 회상/ 김연옥의 증언/ 윤왈렌친의 회고/ 디아스포라/ 토굴집/ 신순남 화백/ 아리랑의 힘/ 스탈린의 이주명령서…….

시인은 고려인들의 개별적 회상을 시로 형상화했다. 시들은 하나같이 비참한 현장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특히 중환자, 노약자, 영유아, 임산부 등이 집중적으로 희생되었는데, 이들에게는 입관할 관도, 상여도, 울 틈도 없이 떠나보내야 했던 고통을 겪은 것이다. 시인은 이들의 처지를 ‘슬픈 거적때기, 가여운 지푸라기, 애달픈 먼지, 짐승, 길 잃은 양떼’ 등으로 비유하고 있다. 시베리아 벌판을 달리는 화물용인지라 칼바람에 그대로 노출되는 추위, 소음과 덜컹거림이 어떠했을지 상상해보라. 여기에다 먹는 일, 배설하는 일, 잠자는 일은 또 얼마나 열악했을까. 스탈린의 강제이주 명령은 참으로 황당했다. 일본군이 쳐들어오면 고려인들이 그들 편을 들 것이라고 예단한 것이다. 그 무렵 스탈린은 정치적 반대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스탈린의 대숙청 희생자는 2백여만명에 이르는데, 고려인 혁명가담자들도 무려 2천5백여명이 총살당했다. 강제이주에 항의하는 고려인들도 모두 죽여 버렸다. 이렇듯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또 하나의 역사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 처절했던 82년 전의 아픈 역사를 ‘시(詩)’로 남긴 ‘이동순’의 시 <디아스포라>는 절망 속에서도 잡초 같은 고려인들의 삶이 이어졌음을 담고 있다.

“말하지 말라 왜 이곳까지 끌려왔는지/ (중략) / 어제도 오늘도 흔적 없이 사라지는 그 사람들은 전혀 잊어라/ 떠나온 연해주 빼앗긴 자유 강제이주 입에 담다가 그들은 붙잡혀 갔나니 오직 땅과 곡식 먹고사는 일만 생각하라/ 봄이면 씨 뿌리고 가꾸고 거두는 그 하나만 애쓰고 노력하라/ 아이들 고려 말 고려 풍습 가르치고 고려 음식 잊지 않게 하라/ (중략) / 외롭고 힘들 땐 이웃들과 함께 모여 고려 음식 만들어 먹고 어울려라/ 정 못 참겠거든 아리랑 노래 살짝 불러라/ 언제 어디서 살더라도 우리가 고려 사람인 것을 잊지 말라”

이정호 수필가·전 울산교육과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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