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세이] 느린 삶의 미학
[아침에세이] 느린 삶의 미학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12.18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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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와. 빨리!”

6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에게 젊은 엄마가 윽박을 지른다. 길을 건너려던 그녀는 파란 신호등이 빨간 신호등으로 바뀌는 바람에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했다.

“너 때문에 신호 바뀌었잖아! 왜 그렇게 느려!”

작은 걸음으로 횡단보도 입구에 막 도착한 아이는 아무 말도 못한 채 눈조차 맞추지 못했다. 입을 다물고 얌전히 서 있다. 아이엄마의 잔소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언성도 높아졌다. 주위 사람들이 듣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빨리 오라고 했는데! 너 때문에 못 건넜잖아!”

아이의 표정이 어둡다. 고개도 시멘트바닥을 향해 있다. 아이는 자신의 보폭대로 걸어왔을 뿐이고 아이엄마는 아이가 뛰어오길 바랐을 것이다. 아이는 자신이 왜 그리 빨리 서둘러야하는지 모른 채 제 나름 열심히 걸었을 것이다. 내 보기엔 아이가 뛰어왔다고 해도, 이미 파란불이 한창 켜져 있던 때였으므로 횡단보도 중간쯤에서 신호가 꺼질 것이 분명했다. 나는 진즉에 건너길 포기하고 일행 한 분과 나란히 다음 신호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실은 나의 지인도 조금 전까지 나를 재촉했던 터였다.

“빨리 와! 어서 건너자. 어서!”

하지만 나는 동요하지 않고 되레 그분을 말렸다.

“선생님, 마음 불안하게 급하게 건너기보다 다음 신호에 건너가요. 모든 사고는 급하게 서둘다가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여유 있게 다음번에 건너가요.”

“왜? 기다리는 것보다 빨리 건너가면 좋지!”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뭐가 좋다는 거지?’

하지만 속으로만 생각했다. 사실은 이분이 횡단보도에서 이렇게 서두른 적이 처음은 아니다. 몇 번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나는 그때마다 ‘다음번’을 외쳤다. 마치 ‘빨리빨리’가 정상이고 ‘천천히’가 비정상인 듯 우리는 일상적으로 자주 ‘빨리빨리’를 외친다. 그저 빨리빨리 서두르는 것이 당연하고 뭐든 빨리 하는 것이 좋은 듯이 여겨지는 일상이다. 이렇듯 뭐든 빨리빨리 하고 빨리빨리 살아가다보니 진정 나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지경이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빨리빨리’를 말하고 그렇게 빨리빨리 대수롭지 않게 행동한다. 이에 대해 별로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다.

요즘은 전화를 하면 한 번에 바로 받는 사람이 드물다. 그만큼 다들 바삐 사는가보다. 그리고 뭔가 모임을 개최할라치면 다들 바쁘다고들 난리다. ‘밥 한번 같이 먹어요!’ 이렇게 말해놓고 지키지 못한 경우가 수두룩하다. 이런 것은 거짓말 축에도 끼지 않는다. 바쁜 세상에서 지키지 못할 약속과 바빠서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꾸만 늘어난다. 아예 죄책감도 없다. 그저 수시로 저지르는 우리의 입 발린 인사치레나 매한가지다. 게다가 요즘은 만나면 아예 인사도 이렇다.

“요즘 바쁘시죠?”

마치 바빠야만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그렇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인양 싶다. 우리는 바쁘지 않더라도 바쁜 척해야 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위와 같은 인사를 들을 때면 나는 이렇게 대꾸한다.

“아뇨! 안 바빠요. 선생님께서 저를 불러주시지 않으니 너무 한가하기만 하네요.”

농담처럼 한마디 던지고는 서로 씩 웃는다. 하지만 바쁘지 않다는 말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물론 남이 보기에 바쁜 것과 내 자신이 바쁘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쁘게 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천천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옛날 미국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빨리 달리다가도 도중에 잠시 멈추어 자신이 달려온 곳을 뒤돌아보는 습성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혹시나 미처 따라오지 못할지 모르는 자신의 영혼을 염려한 때문이라고 한다. 바삐 돌아가는 세상에서 이 인디언의 얘기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삶의 통찰을 전해준다.

책, ‘시의 숲에서 길을 찾다’를 읽다가 만난 아래의 시 역시 큰 울림을 주었다.

바쁘게 살면/ 늙은 부모님 뵙고/ 어깨 한 번 주물러 드릴 수 있겠는가/ 병든 형제를 찾아/ 위로 한 마디 할 수 있겠는가/ 시름에 겨운 벗을 만나/ 술 한잔 따를 수 있겠는가/ 가난한 이웃과/ 따뜻한 밥 한 끼 나눠 먹을 수 있겠는가// 바쁘게 살면/ 내가 누군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알기나 하겠는가/ 바쁘게 살면/ 복 짓는 일보다/ 죄 짓는 일이 많지 않겠는가// 부끄럽게도/ 그렇게 살았다, 나는/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서정홍 시인의 ‘때늦은 깨달음’ 전문-

더 이상 바쁘게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자성과 삶의 진정한 가치를 돌아다봐야겠다는 생각이 가슴으로 훅 전해져 온다. 가슴이 먹먹한 채로 시의 곁에서 오래도록 머물렀다. 또한 느리면서도 잔잔한 아름다움이 있는 삶을 떠올려본다.

바쁘신 그대여, 언제 그대와 밥 한 끼 먹고 싶소! 바쁘신 그대여, 언제 시 한편 그대와 나누고 싶소! 바쁘신 그대여! 당신의 영혼은 지금 어디쯤 있습니까?

추운 겨울날씨 속, 느리지만 따뜻한 삶을 향해 바쁜 오늘을 돌아보자!

구경영 북토크쇼 ‘꽃자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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