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기마을 편지] 옹기 장인의 삶
[옹기마을 편지] 옹기 장인의 삶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12.12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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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를 만드는 사람을 옹기장이 혹은 옹기 장인이라 부른다. 옹기가 가장 다양하게 그리고 많이 생산된 시기는 조선 중기이며 현재 남아있는 골동옹기 대부분도 그 시대의 것이다.

옛날에는 옹기업이 굉장히 천한 직업이었기 때문에 옹기장이들은 천민 취급을 받아야 했다. 옹기장이들이 대접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근대에 들어 옹기의 수요가 점차 늘면서부터였다. 그렇다고 옹기장이 모두가 대접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옹기물레대장만 대접을 받았을 뿐이다.

1950년~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옹기물레대장들의 지위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6·25 전쟁을 거치면서 옹기가 많이 파손되는 바람에 옹기의 수요가 갑자기 늘어나면서 옹기물레대장들의 벌이도 최고조에 이른다. 그 당시 옹기공장 공장주와 옹기물레대장들은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다.

굉장히 큰 규모의 옹기공장에는 일하는 사람만 거의 100명을 헤아리기도 했다. 그네꾼이라 하여 허드렛일만 하는 사람, 옹기 장인이 옹기를 만들 수 있게 기 흙타래만 만드는 사람, 옹기를 건조만 하는 사람, 유약만 만드는 사람, 불대장이라 하여 불때기만 전문으로 하는 사람 등등으로 철저히 분업화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은 옹기물레대장이었고, 옹기공방에 들어가 허드렛일을 10년은 해야 겨우 옹기물레에 앉을 수 있었다. 물레대장은 그날의 마지막 옹기를 혼자서는 못 들 정도로 큰 대독으로 만들어 물레 위에 올려놓은 다음 퇴근했고, 그 다음날 출근해서는 밤새 누가 옹기를 내려놓고 물레를 사용했는지 알기 위하여 물레를 한 번 빙 돌려보고 중심이 맞는지 어쩐지 반드시 확인을 했다고 한다.

그러니 견습생들은 큰 옹기는 찌그러질까봐 내릴 수도 없고 물레 연습은 하고 싶고 해서, 밤새 물레를 바라보며 속만 태웠다는 웃지 못 할 일화도 전해진다. 그만큼 물레대장의 위치는 대단했고, 벌이가 워낙 좋다 보니 자기들만 그런 호사를 누리고 싶었을 것이다.

견습생들이 겨우 물레간에 앉게 되어 물레대장의 가르침을 받는다 해도 그 뒤로 10년은 더 배워야 제대로 된 옹기를 만들 수 있었다. 견습생이 된 이후 적어도 20년이 지나야 물레대장이 될 수 있었던 셈이다. 물레대장의 지위가 올라가고 벌이가 좋았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당시에는 물레대장이 되고 싶은 사람이 많았다. 물레대장의 꿈을 안고 옹기공방에 들어가도 일이 너무 고되고 버텨야 할 세월이 너무 길다보니 중간에 그만두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20년이 지나도 배울 기회마저 잡지 못하고 평생 허드렛일만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실력 있는 물레대장을 모셔오기 위한 옹기공장 주인들의 유치 경쟁도 대단했다. 물레대장의 실력은 하루에 누가 대독을 가장 많이 만들 수 있는지, 누가 정확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잣대로 평가했고, 월급도 실력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 음식문화가 서구식으로 바뀌면서 발효식품의 수요는 점점 줄어들었고, 주거문화가 아파트 형태로 바뀌면서 장독대도 하나둘 사라져 갔다. 자연히 옹기의 수요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옹기사업이 사양길을 걷게 되고 옹기물레대장의 위세가 꺾이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옹기공방의 운영방식도 바뀌어 예전과는 달리 옹기물레대장 혼자서 허드렛일, 유약 작업, 불때기 작업을 다 감당해야 되어 할 일은 많아졌지만 수입은 줄어만 갔다.

이렇게 평생을 물레대장으로 살아온 옹기 장인들은 타렴(=도자기를 만들때 밑바닥위에 둘러 놓은 흙 가래를 늘리면서 그릇 벽을 세워 올리는 일)을 너무 많이 하다보니 손가락은 휘고, 물레를 앉아서 왼쪽다리로만 차다보니 다리도 많이 아프고 걸음걸이도 이상하게 변해 갔다.

그래도 아직까지 이 땅에 남아있는 옹기물레대장들은 대장이라는 자부심을 잃지 않고 전통옹기의 맥을 잇는다는 사명감으로 오늘도 물레를 돌리고 있다. 지난날 그 번창했던 시절의 기억을 곱씹으면서….

김미옥 울산옹기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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