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치기 글쟁이의 ‘핑계’
얼치기 글쟁이의 ‘핑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12.10 20: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올해의 마지막 달력 한 장을 보면서 나의 삶을 돌아본다. 벌써 일 년의 마지막 달이라고 생각하니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게 된다. ‘마지막’이란 단어가 주는 쓸쓸함과 외로움에 남은 보름 남짓 동안 피할 수 없는 진실들을 정리하고 마무리를 잘해야겠다는 약속을 한다.

사실 초등학교 글짓기 시간에 내가 쓴 글이 교실 뒷벽에 내걸린 기억도, 중고등학교 때 교내 백일장 대회에서 상을 탄 기억도 거의 없다. 대학생 시절, 리포트를 써내는 것은 언제나 고된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우연한 기회에 언론사에 칼럼을 연재했고 시나브로 소박한 이름을 얻은 ‘글쟁이’가 돼 있었다.

그러나 내가 글쟁이로서, 다시 말해 얼치기 시사경제칼럼니스트로서 독자들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욕심(?)으로 보이는 계속되는 글쓰기는 알게 모르게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바람은 보이지 않아도 다가왔음을 안다. 오늘로, 글쓰기를 접는다. 언젠가 되돌아올 수도 있겠지만, 일단 접는다. 절필(絶筆)이니 휴필(休筆)이니 원필(援筆)이니 하는 말은, 내키지 않는 사태를 피하거나 사실을 감추려고 방패막이가 되는 다른 일을 내세우는 ‘핑계’라는 생각이다.

오랜 기간 글쓰기가 남다른 추억이자 ‘소확행(小確幸)이 될 줄은 몰랐다. 내가 만든 작지만 확실한 행복은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이었다. 내 것이 될지 알 수 없는 미래의 ‘큰 행복’이 아니라 둘러보면 매일이라도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이었다.

물론 개인의 행복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지에 대한 관심은 이전에도 있었다. 2000년대 초에는 ‘웰빙’이 화제가 됐고, 시간이 지나면서 ‘힐링’이라는 단어로 대체됐다. 2년여 전에는 ‘욜로’라는 키워드가 대두되며 각광을 받았다.

각각이 그리는 행복의 내용에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여기엔 상대적인 풍요가 전제되어 있었다. 하지만 ‘소확행’은 악화된 경제사정과 희망이 옅어진 팍팍한 삶을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인간관계라는 사회 변화도 그전엔 없었던 말들로 변천하고 규정된다. 몇 년 전부터 회자된 ‘관태기’(=인맥의 유지나 관리에 피로감이나 회의감을 느끼며 새로운 관계에도 부담을 느끼는 상태)나 ‘티슈인맥’(=쓰고 버리는 티슈처럼 필요할 때만 소통하는 일회성 인간관계), ‘인맥다이어트’(=번잡한 인간관계에 따른 스트레스나 바쁜 생활 때문에 의도적으로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행위) 등은 이제 ‘신조어’라고 하기 어색할 정도로 일상화되었다.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이 점철된 인생사와 문장부호 중에 ‘쉼표’와 ‘마침표’는 비슷하다. 자칫하면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 순간적으로 착각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쉼표와 마침표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의미와 기능 면에서 차이가 난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쉴 때와 마칠 때를 잘 헤아리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우리네 인생은 쉼표를 찍어야 할 때가 있고, 마침표를 찍어야 할 때가 있다. 차마 마침표를 찍지 못해 쉼표를 찍을 때도 있다. 물론 쉼표를 찍어야 할 때 마침표를 찍어서 두고두고 후회할 때도 있다. 쉼표와 마침표를 제대로 찍을 줄 아는 사람, 그 사람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이미 절반은 성공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지난 6년간 내 글을 읽어주신 이름 모를 독자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의미 있는 마침표와 쉼표에서 욕심을 비우고 지혜를 배워, 더 멀리 그리고 더 오래 뛰기 위해서 다시 뛸 준비를 하고자 한다. 중년은 젊은 사람도 늙은 사람도 아닌 늙은 청춘인 것이고, 나이 드는 것이 아닌 익어가는 과정일 뿐이다.

신영조 시사경제칼럼니스트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