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염소’ 이야기
‘겨울염소’ 이야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11.24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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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는 ‘수염이 있는 소’란 뜻으로 부르게 된 이름이다. 조선시대 이전의 문헌에는 고양(?羊)·고(羔), 염우(髥牛)란 표현이 나온다.

염소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다. 기르던 염소 가족을 사라호 태풍 때 잃었기 때문이다. 가족은 잠을 자다 말고 깨우는 아버지의 등에 업혀 높은 지대에 있는 초등학교로 피신했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초가집은 온통 모래에 묻혀 용마루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어림잡아 궁거랑 폭보다 두세 배 정도 넓은 내송천 가장자리에 집이 있었다. 가까이에 있는 내송다리가 화근이었다.

홍수에 떠내려 온 나무가 폭 좁은 다리발에 걸려 막히면서 물을 담아내는 역할을 했다. 불어나는 물은 빙글빙글 돌면서 차오르다 넘치면서 집을 삼켜버렸다. 그때 염소들도 함께 변을 당했다. 새끼 때부터 정들여 기른 탓에 어린 나이였지만 한동안 마음이 아팠다. 염소를 볼 때마다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육십여년 전의 일이다.

염소를 방목하면 야생성이 강해진다. 해발 600여 미터 되는 기장군 철마산에 염소 몇 마리가 살았다. 집에서 키우던 염소였는데 동네사람들은 관리 잘못으로 도망을 쳤다고 입을 모았다. 털이 길게 자란 채 무리를 이룬 염소는 가파른 철마산을 평지에서 말 달리듯 뛰어다녀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다. 마릿수는 해마다 늘어났다. 동네사람들은 ‘철마산 염소는 먼저 잡는 사람이 주인’이란 말을 입버릇처럼 해댔다. 삼십여 년 전의 이야기다.

‘염소수염’이란 숱이 적고 길지 않은 수염을 염소에 빗대서 하는 표현이다. 현재의 외국에서와는 달리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염소수염이 부러움이나 선망의 대상은 아니었다. 극중에서도 간사한 인물을 묘사할 때 자주 등장하는 것이 이 분장이다. 특히 사극에서 염소수염이 의미하는 것은 십중팔구 간신이 아니면 역적이다.

인문학에서 ‘늙은 염소’는 지혜의 은유적 표현이다. 어쩌다 집에서 기르는 늙은 숫염소를 보다 보면 큰 뿔, 길게 자란 털, 무릎의 굳은 살, 빛바랜 수염, 느린 움직임에서 지혜와 카리스마를 느낀다. 인생에 비유하면 산전, 수전, 공중전에 지하땅굴전까지 경험한 인생 팔십의 노장(老丈)이다. 산자락에 풀어주어도 먹는 것은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다. 그저 높은 곳을 향하여 먼 곳을 바라보는 듯, 속세를 떠난 듯 지그시 눈을 감고 되새김질을 한다.

주인이 늙은 염소를 무리에서 함부로 도태시키지 않는 이유는 늙도록 쌓아온 경험이 항도의 몫을 단단히 함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검은 바탕을 이루는 하늘이 별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이치와 다르지 않다. 젊은 사람의 멘토가 ‘늙은 염소’에 비유되는 이치와도 같다.

속담 중에 ‘겨울염소’, ‘여름염소’라는 말이 들어가는 속담이 있다. 언뜻 생각하면 겨울철 염소와 여름철 염소쯤으로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아하! 그렇구나.’ 하는 말이 절로 나올 것이다.

먼저 ‘겨울염소’라는 표현은 대개 부정적 이미지로 사용된다. 그 하나가 아무데나 끼어들어 간섭하는 사람을 빗대어 이르는 말로, 이때는 남녀노소 구분이 따로 없다. 친구 중에 이런 친구가 꼭 있고, 노인 중에도 그런 분이 한둘은 꼭 있다. ‘OO은 겨울염소같이 입 안 대는 곳이 없다’는 말을 예로 들자. 이런 말은 ‘약방에 감초’, ‘안다이 똥파리’처럼 점잖지 못한 행동을 함부로 하는 사람을 빗대어 하는 표현이다. 동네마다 지역마다 겨울염소는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진작 본인은 그런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 ‘겨울염소’의 특징이다. 누가 귀띔해 주지도 않는다. 뒷담화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겨울염소는 고집이 센 사람을 가리킨다. 겨울철에는 염소끼리 서로 체온을 나눌수록 혹한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는데도 굳이 제각기 혼자 떨어져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가관이다. “너만 춥나, 나도 춥다. 그래도 떨어져 있자.” 이기주의의 표상이라 하겠다. ‘여름염소’란 겨울염소와는 반대로 “너도 덥지, 나도 덥다. 그러니 붙어 자자” 하면서 무더운 여름 날씨에도 꼭 붙어서 자는 행동을 빗대어 하는 말이다. 겨울염소는 ‘가르칠 것만 있고 배울 것은 없는 사람’, ‘지적질만 있고 실천이 없는 사람’, ‘입으로만 해결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말한다면 이는 틀림없는 겨울염소다. 타인의 바른 길을 애써 외면하면서 자기의 굽은 마음을 내세우는 것이 겨울염소다. 혼자만 말하고 남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 사람이 겨울염소다.

겨울염소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일생동안 모퉁이돌이 되지 못하고 끝내 걸림돌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등불을 들고 사람을 찾는 것이 늙은 염소가 하는 일이라면, 켜져 있는 등잔불을 일부러 찾아다니며 훅하고 꺼버리는 것이 겨울염소가 하는 일이다. 늙은 염소는 숨는 반면 겨울염소는 돌아다니면서 간섭을 한다. 겨울염소는 지나온 인생의 흔적이 없기에 늙을수록 보기에 안타깝다. 이웃에 대한 배려보다 오직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배타적 삶을 사는 것이 겨울 염소다. 이밖에도 ‘염소 물똥 사는 것 봤나’, ‘염소 기침하는 것보다 쉽다’와 같이 염소의 생태에서 비롯된 속담들이 간간이 사용되고 있다.

김성수 조류생태학박사·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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