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전병원’에 대한 추억
‘서전병원’에 대한 추억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11.10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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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전쟁 당시의 기억이 그리 많지는 않다. 전쟁이 났을 때 겨우 세 살이었고 전쟁이 끝났을 때 여섯 살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래도 추억의 주머니를 뒤지다 보면 한 움큼은 손에 쥐어진다. 지하방공호와 피난민, 여러 날밤 온 시가지를 화염으로 뒤덮은 부산역 대화재(1953년 11월 27일)와 미군에 의한 ‘신작로’ 개설, 그리고 ‘이승만 별장’과 서전병원이 그것.

지하방공호는 6·25의 포성이 부산까지는 와 닿지 않아 쓸모도 없이 땅속에 묻혔지만 어릴 적 호기심은 지금도 추억의 잡기장에서 아렴풋이 되살아나곤 한다. 그리고 고향동네에는 서울서 피난 내려온 의사네 집안이 서울 수복 때까지 ‘의원’ 간판을 내걸었고, 동네 아이들은 그 집 아이를 ‘서울내기 다마네기…’라며 짓궂게 놀려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서전병원’이 무슨 의미인지, 어려서는 잘 몰랐다.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이따금 놀러 다닌 곳은 백사장이 널찍하게 펼쳐진 이웃동네 바닷가. 그 바닷가 백사장의 상당부분은 출입금지 팻말 격인 철조망이 늘 둘러쳐져 있었다. 뒤늦게 안 일이지만, 그곳은 부경대에 흡수된 ‘국립 부산수산대학’의 실험용 어패류양식장이었다. 대학 안으로 들어서면 맨 먼저 마주치는 것이 아담한 단층 석조건물 ‘이승만 별장’이었고, 그 다음 만나게 되는 것이 일자로 길게 늘어선 대학 본관 건물 내 ‘서전병원’이었다.

서전병원의 ‘서전’은 한자로 서전(瑞典) 즉 ‘스웨덴’을 일컫는 말이다. 당시 영세중립국 스웨덴에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난 1950년 7월부터 ‘가장’이란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다. 의료지원단을 보낸 다섯 나라 중에서 가장 먼저 UN에 파견 의사를 밝혔고, 가장 큰 규모를 유지했으며, 가장 오랜 기간 활동하면서, 가장 많은 환자를 돌보았기 때문이다.

여러 기록들에 따르면 스웨덴 각지에서 자원한 176명의 ‘서전 의료지원단’은 그해 9월 23일 부산에 도착했다. 그러나 부상자가 급증하자 도착 이틀 만에 옛 부산상고(현 롯데백화점 부산본점) 운동장에 200병상 규모의 적십자 야전병원을 세우고 진료를 시작했다. 이 무렵은 인천상륙작전(9월 15일) 이후 한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되찾고 반격에 나서던 시기였다. 이때만 해도 ‘수산대학 내 서전병원’은 이름이 생기기 전이었다. 스웨덴 의료지원단은 1953년 정전협정이 맺어진 뒤에도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부산 스웨덴 병원’으로 이름만 바꾼 채 전쟁난민과 극빈자 진료에 최선을 다했다.

서전병원이 옛 부산상고에서 수산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1955년 5월, 한국에서 완전 철수한 것은 1957년 4월의 일이었다. 그래도 일부 의료진은 한국에 남아 결핵 퇴치 사업에 전념했다. 스웨덴 의료진 1천124명이 무려 6년 6개월 동안 진료한 부상자나 환자는 적군, 아군, 민간인을 안 가리고 200만 명을 넘었다. 이것이 인류애 실천의 세계적 모범사례가 아니고 무엇인가.

서전병원이 만 2년 가까이 둥지를 텄던 옛 부산수산대학 자리는 UN 소속 ‘유엔기념공원’에서 그리 멀지 않다. 때마침 11월 11일, 이 기념공원에선 ‘Turn Toward Busan’(턴 투워드 부산)이란 이름의 추모행사가 열린다. 필자도 오전 11시부터 1분간 고향동네에서 가까운 유엔기념공원을 향해 묵념을 올릴 참이다. 서전병원에 대한 추억과 스웨덴 의료지원단의 숭고한 정신을 다시 한 번 기리기 위함이다.

2017년 9월 13~30일 부산 동아대 부민캠퍼스 미술관에서 ‘서전병원-스웨덴 참전용사 눈으로 본 피란수도 이야기’란 사진전이 열렸을 때 누군가가 한 말이 있다. “Let us never forget.(우리 결코 잊지 맙시다.)” 스웨덴 의료지원단과 서전병원은 잊지 못할 추억의 한 조각으로 남을 것이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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