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KTX열차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까지 간 일이 있었다. 개찰구(改札口, 기차표를 보이고 확인을 받는 곳)인 것 같은 곳을 전광 안내에 맞추어 그냥 통과하고, 지정 좌석에 앉아 바깥 구경을 하다가 잠이 들고, 서울역에 내릴 때까지 검표를 받아보지 않고, 그냥 서울역 밖으로 나왔다. 어쩐지 옛날과는 달라서 서울역 여행 안내소에 들러 ‘어떻게 된 것입니까? 기차표를 받지도 않고 검표도 않으니---’ 안내직원은 빙그레 웃으며 ‘오래 되었습니다. 고속철 안내 직원이 객실을 지나면서 조용하게 모두 확인하였습니다.’ ‘다른 기차도 그렇게 합니까?’ ‘예, 모두 그렇게 합니다.’
한 줄로 줄을 세워 개찰하고, 객실에서 검표하고, 목적지에 내려서 다시 표를 내고 역을 빠져 나가는 ‘의심하고, 의심 받던 시대’가 오래 전에 없어졌다. 지금 우리는 KTX를 타려면 이 정도의 신용관계가 있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규정대로 표를 사고, 기차를 타야하고, 승무원은 승객이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신용은 기본 도덕성에서 나온다. 절차상 먼저 밝혀야 할 것을 가만히 엉큼하게 덮어놓고 있다가, 발각되어 문제가 되니까 ‘물어봤소?’하는 더러운 행동에서, 밝혀도 거짓말로 밝히는 사기꾼 같은 행동에서 우리는 기본 도덕성을 찾을 수 없다. 가장 도덕적인 사람은 그의 행동에서 숨길 것이 없는 투명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를 존경하고 따라서 믿게 되는 것이다. 신용사회는 서로 숨기는 것이 없어서 믿을 수 있는 사회이다. 이런 사회의 형성은 학교에서 연습되고 실행되어야 한다. 학교에서 신용사회의 연습으로 ‘무감독 고사(無監督 考査)’를 실시할 때 언론의 초점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지금의 학교교육은 전교조가 감시를 하고 있는데도 항상 의심을 해야 하는, ‘휴전선의 철책 보초’와 같은 감시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 머물고 있다. 학생과 교사가 가장 서로 믿고서 생활해야 하는 곳이 학교인데도 불구하고 책임을 맡은 교사부터 걸리기 전까지는 비밀로 덮어두어버리는, 이에 동조하는 다른 교사들, 여기에 농락당하는 학생들이 있어서 학교교육을 교사의 자율에 맡길 수 없는 현재의 상황이다. 교사부터 결과만 좋으면 되지 하는 사고방식으로 채워져 있어 큰 걱정이다. 교육은 과정(過程)도 결과만큼 중요한 것이다. 이런 교육의 기본 철학조차 같지 않은 사람이 교육 일선에 서 있으면 그 학교, 그 나라 교육은 자율에 맡겨서는 안 된다. 각 급 학교, 특히 대학의 자율은 좀 기다려야 한다. 초등학교, 특히 중학교의 작은 프로젝트에서부터 고등학교의 내신 성적까지 도덕적으로 투명하게 운영되어 믿을 수 있는 학교풍토가 조성되기까지 국가로부터 감시감독을 받은 뒤, 그 기초 위에 대학의 자율성이 주어져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