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국수를 먹으면서 세상을
칼국수를 먹으면서 세상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10.03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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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에서 강의를 마치고 서울로 상경한다. 집으로 귀가하기 전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칼국수 집으로 향했다. 평소 자주 들르는 명동의 유명한 칼국수가게다. 대학을 다닐 때부터 먹어왔으니 수십 년째나 된다. 단골손님이라도 이렇게 오래된 고객이 있을까 싶다. 그만큼 나는 알싸한 맛의 칼국수를 좋아하는 것 같다.

오늘, 강의하는 도중 예기치 않게 법무장관에 관한 이야기가 불쑥 나왔다.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는 소위 조국 사태다. 이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학생들의 반응은 찬반으로 나누어진다. 씁쓸한 기분이다. 이 좁은 땅에 양자로 나누어 살겠다는 의미인가? 요즘은 어디를 가나 한일관계도 그렇고, 한미관계도, 남북관계도 모두 양자의 진영논리뿐이다. 한마디로 불안감마저 든다.

식사 후, 명동거리를 지나 시청 앞을 거쳐 광화문 대로로 들어섰다. 가을 빛 햇살이 내리쬐는 세종로는 언제나처럼 지나가는 인파들로 북적댔다. 행인들의 걸음걸이는 가벼워 보였다. 평일이라 경찰호송차 몇 대만 도로가에 세워져있다. 여기는, 매번 주말마다 와글거리던 장소로 보수, 진보 모두 자기들의 주장을 외쳐대던 성토장이 아닌가? 수요일 평일이라 세종 대로 건널목에는 몇 군데에 플래카드만 들고 있는 사람밖에 없다. 지나가는 행인들은 그저 무덤덤하니 쳐다보고는 제 갈 길을 재촉한다. 세종대왕 동상이나 이순신장군 동상의 모습은 아무런 흔들림 없이 제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지금 우리의 진영논리에 아무런 존견(尊見)도 없는 듯 개의치 않는다.

동양철학에서는 ‘의사결정’의 문제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춘추전국 선진(先秦)시대에, 제자백가(諸子百家) 논쟁은 진영의 논리를 공론의 장으로 잘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제자백가란 그 당시의 사상가들이 주장하는 학파다. 각자 자신의 이름을 걸고 복수의 주장을 쏟아내는 것이다. 그들 중 일파인 ‘묵자’(墨子)는, 다양한 사상가들의 목소리를 내는 그 당시 시대상황을, 다음과 같이 상세히 표현했다.

‘사람이 하나면 주장도 한 가지, 사람이 열이면 주장도 열 가지, 사람이 백이면 주장도 백 가지였다. (중략) 단순히 주장이 늘어난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주장이 늘어나면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을 옳게 여기고 타인의 주장을 그르다고 하여 서로 번갈아 비판을 일삼게 되었다.’〔?同편, 신정근 역〕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양자의 논리를 벗어나기 위해서, 지혜로운 ‘순자’(荀子)는 한 가지 현명한 ‘기준’을 내세웠다. ‘지지유고 언지성리’(持之有故 言之成理)라 하면서 말이다. 즉, 한 가지 주의주장을 가지려면 반드시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주장하려면 반드시 이치가 있어야 한다고…. 만약 이러한 기준이 없다면 그냥 떠벌리는 것과 주장하는 것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하고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고 하면, 서로가 만족하는 접점에서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합리적인 금언인가. 이 아름다운 강산, 살기 좋은 나라에 살기 위하여 다 같이 화합·협력하는 평화로운 나라로 만들어야 하지 않는가? 지금 우리는 상대의 단점과 트집만 잡고 서로 헐뜯고 있지는 않은가?

인간은 자고로 시행착오를 겪으며 커나가는 것이다. 비오는 날 우산을 받치고 걸어가면, 입고 있는 옷가지는 당연히 젖지 않는다. 하지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 ‘빗방울’의 본질을 진정 알 수 있을까?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다. 한 인간이 아무런 자극도 없이 위험부담도 없이 산다면 세상의 물정을 알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함으로써 더욱 단련된 인간이 되고 희망찬 화합의 나라가 만들어질 것이다. ‘순자의 명언’을 되새기면서 우리 모두 화합하고 서로 용서하는 국민이 되도록 노력하자.

김원호 울산대 인문대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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